유럽사와 이슬람 유럽사와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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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랍 이슬람세계는 610년경 메카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였다. 이 이슬람제국이 시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까지 영역을 넓히게 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지중해에서의 입지는 흔들리게 되었다. 아랍인들의 정복에서 나타난 특징은 짧은 기간 안에, 매우 용이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해군력에 의지해온 비잔틴 제국은 아랍과의 육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제국의 군대는 서고트 왕국을 침략하고 프랑크 왕국과 투르. 푸아티에 전투를 치루면서 기독교 세계와의 접촉 하게 되었고, 나아가 북진하여 이슬람화 시켜나갔다. 또한 이베리아반도는 이슬람이 장악하였으나, 1492년을 기점으로 다시 기독교세계가 되었다. 아랍 해적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들은 메시나를 거점으로 동지중해 진출을 꾀하였고 나아가 지중해는 이슬람제국의 것이 되었다. 그로인하여 유럽 중심의 지중해 문화는 변모되었고, 이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운동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침략과 더불어 바이킹으로 명명되는 노르만족 또한 기독교세계의 침략을 꾀하였다.
제 2장 유럽 기독교세계의 대반격 : 8차례에 걸친 십자군의 원정
십자군전쟁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아랍인과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위축되었던 유럽세계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교황권의 신장으로 기독교의 교세가 확대 되었다. 이 때 셀주크 투르크는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였다. 우르반 2세는 기독교 세계의 통일이라는 꿈과 특히 자신의 과세권을 기독교세계 전체로 확대할 것을 이루기 위해 이를 빌미로 십자군전쟁을 지시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총 8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성공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1회 십자군 단 한차례였다. 십자군이 회를 거듭하면서 그 의미가 종교와 상업, 신앙심과 탐욕심의 결합이라는 것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전쟁은 농민군이 병졸의 대다수이며, 교통, 통신수단의 발전에 비해 원거리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 것, 국왕과 대영주들의 지휘부로 선 것 등 이러한 이유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운동을 통해서 유럽세계는 잠시나마 다시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으나,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와의 적대의식을 북돋우고 대립을 심화 시켰다. 그러나 십자군과 무슬림의 만남으로 일부 동서양을 혼합한 세계가 생겨나게 되었다. 십자군은 만행을 저질렀으나 기독교를 처음으로 유럽 이외 지역으로 확산시켰고, 서구의 진보를 촉진시켰다는데에서 긍정적이 면모 또한 확인 할 수 있다.
제 3장 이슬람세계의 재공격 :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비잔틴제국 정복
셀주크 투르크족에 이어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이슬람세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비잔틴제국을 정복함으로써 비잔틴제국은 약화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족과 대립관계에 있었고, 이슬람제국으로 인하여 십자군운동을 겪었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후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침입으로 함락되었다. 비잔틴 제국을 함락시킨 뒤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발칸반도를 장악하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쪽의 영토 또한 확장하였다. 또한 오스만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로의 진출을 꾀하면서 무력의 사용 없이 이 지역의 그리스인과 융합이 이루어졌다.
비잔틴제국이 그리스세계에서 이슬람세계로 변모되면서 기독교 문화유산도 바뀌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성소피아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이슬람의 문화에 맞게 변화되어지고,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또 다른 것으로는 파르테논신전이 있다. 신전의 일부분이 파괴되었고, 그 모습도 이슬람에 맞게 변모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제국에게 함락되었지만 비교적 우수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고, 산업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또한 신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 건축, 예술도 우수한 모습을 갖고 있었으며 서구 기독교 세계를 보호하였고,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고전문화를 보존하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제 4장 가톨릭교 신성동맹의 오스만 투르크제국 응징 : 레판토 해전
유럽 기독교세계는 종교개혁운동으로 대립과 혼란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지방분권적 봉건제도로 인하여 제권이 약화되었다. 이 때 루터의 종교개혁 후 독일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30년 전쟁 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도시는 신앙의 자유와 독립권을 얻었으나 제국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프랑스 또한 종교전쟁인 위그노전쟁으로 무정부상태였고, 전쟁 후에도 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영국은 헨리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고 뒤이어 엘리자베스 1세가 통일령을 내리면서 국교회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교파 사이의 대립은 계속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지중해세계로의 진출과 더불어 발칸반도의 일부를 장악하였다. 발칸반도에서 헝가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헝가리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발칸반도의 디고교도들은 점차 투르크 족과 공생하며 기독교도로 개종하였다.
교황 피우스 5세는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유럽세계는 교황의 제의에 선뜻 응할 수 없었다. 결국 신성동맹은 지연되었으나 결국 결실을 맺게 되었다. 술래이만 시대의 투르크제국의 해군은 강력했으나 레판토 해전이 일어날 무렵의 해군력은 미흡하였고 신성동맹에게 참패하였다. 레판토 해전으로 기독교세계의 대의가 높아지고 유럽 기도교들에게 투르크족을 응징하였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갖게 했다. 오스만 제국은 왕성한 팽창력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제 5장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의 발칸반도에서의 재격돌 : 그리스와 터키의 역사적 대결
비잔틴제국이 오스만제국에게 정복당한 뒤로 그리스인들은 식민 통치를 받았다. 그리스는 독립을 위하여 노력했다. 빈회의에 기대를 걸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리스 독립운동 조직은 크게 확대되었다. 모레아사건과 키오스 섬 사건이 있음으로서 그리스인들과 터키인들 사이의 관계는 대립을 넘어 점차 악화 되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는 ‘친그리스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분쇄하기 위했으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군사적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면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독립 후 그리스와 투르크의 국경 확정 문제가 대두되면서 친선관계의 유지보다는 대립과 충돌의 모습이 나타났다. 또한 1차대전 뒤인 사브레조약은 그리스-터기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양국은 에게해의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이 대립은 키프로스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는 수백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사건으로 그리스계와 터키계 주민 사이의 대립과 긴장이 악화되었다. 유엔의 평화유지군이 그리스-터키 전쟁으로의 발전을 막았다. 그러나 그리스 측의 장교들은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병합을 추진했다. 이에 터키군은 키프로스의 40%를 장악하였다. 키프로스는 두 개의 독립국으로 분열되어 있다.
제 6장 시오니즘과 이슬람주의의 운명적 대결 : 이스라엘의 건국과 4차례의 중동전쟁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식민통치하에 고통받은 다수의 유대인이 고국을 떠난 이후 2천여 년을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유랑하는 민족의 비애를 겪어왔다. 이들은 핍박받았고,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수용소로 붙잡혀 온 유대인들은 5백만 내지 6백만명이 죽었다. 이에 유대인은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 국가를 세우지 않고는 유대인이 박해라는 역사적, 현실적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헤르츨은 시온주의 운동의 본부를 빈에 두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려고 했으나 이미 아랍인의 주거지였다. 이에 헤르츨은 시온주의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그 즈음 팔레스타인에서도 아랍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제 1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발포어선언’으로 유대인의 적극적 전쟁지원을 제의하면서 시온주의운동에 대한 지원을 조건으로 걸었다. 그러나 영국은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손을 떼고 그 지역의 장래를 국제연합에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발포어 선언 30여년 만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였다.
아랍민족주의의 한 흐름인 이슬람부흥운동은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쇠퇴와 함께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이 서구의 식민지가 되거나 위임통치를 받으며 이슬람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주도권은 기독교도 유럽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이슬람사회는 자신들을 되돌아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순수 이슬람, 원래의 이슬람으로 복귀를 주장했다. 와하비 운동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건국이념이 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중동지역은 물론 여타 지역의 이슬람부흥운동에 자극을 주는 등 이슬람세계의 부흥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이슬람화운동에도 자극을 주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약화되면서 이 지역으로의 서구의 침략이 심화 되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합병하였고, 영국은 이집트와 수단을 식민지로 삼았다. 리비아와 모로코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점령되었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 유럽의 기독교적 문화와 사상이 서서하지만 착실하게 침투했다. 반면 아랍인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은 상처받고 손상 받았다. 이 때 새로운 유형의 무슬림 지식인들이 서서히 등장해 이슬람운동을 이끌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분리하여 통제하는 정책으로 중동지역의 아랍인들을 제어하려 했지만 이들의 민족주의가 강렬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억제는 힘들었다. 이로써 아랍인들은 서양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국가 이슬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등장하면서 중동전쟁으로 표면화되어 나타났다.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자 아랍국은 팔레스타인으로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으나 종교와 인종이 얽힌 두 집단 사이의 대립과 분쟁은 마감되어지지 않았다. 4차례의 전쟁에도 중동지역은 평화를 도래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자살폭탄테러와 보복공격으로 새로운 전운이 짙어지고 있다. 이러한 자살테러는 아랍-이슬람세계의 부정할 수 없는 한 정서라고 한다면 중동지역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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