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와 이슬람_유럽사와 이슬람_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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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610년경 메카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잠깐 메디나로 옮겼다가 630년에 메카로 귀환한 후에 아랍 이슬람세계의 선공으로 기독교세계에 완승을 했다.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하고 나아가 지중해해상권을 장악하여 기독교도들을 유럽대륙으로 몰아 넣었다. 지중해 일대가 무슬림의 땅이 되면서 지중해는 무슬림의 지배권에 놓이게 된다. 당시 지중해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중해세계의 중심지여서 매우 중요했다. 642년에 아랍인들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여 지중해를 아랍인들의 활동무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의 시리아이집트 정복은 여러 요인들로 단 기간에 이뤄졌다. 비잔틴제국은 아랍인의 진출을 지지한 시리아와 이집트의 단성론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고 과도한 착취를 했다. 지중해로의 진출은 어려웠지만 대규모 해전으로 승리했다. 이후에도 아랍은 비잔틴을 주공격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불’로 인해 아랍의 제해권은 일시 무너졌다. 이는 그들의 북아프리카에서의 입지도 약화시켰다. 그러나 우마이야조의 압둘 알 말리크의 아프리카 재정복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 이집트에서 모로코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전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은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했다. 이베리아 총독 압둘 알 라만은 아키테느 지역을 포기 못하여, 보르도를 장악한 그는 파리로 연결되는 투르에서 7일간의 투르전투(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전 결전)를 치룬 후 프랑크왕국은 아랍세력을 쫓아내지만 일부는 여전히 아랍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프랑스를 알라의 땅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베리아반도 장악에는 성공했다. 이 때부터 무슬림과 기독교들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이후 무어족을 몰아내고 이베리아반도를 기독교세계로 만들기 위한 십자군운동은 성공한다. 한편 아랍 해적들은 이슬람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게 되면서 유럽의 지중해 연안지역으로 진출하여 노략질과 살육을 일삼았다. 특히 튀니스에 근거를 둔 아랍인들은 이탈리아 남부를 괴롭혔고 결국 팔레르모를 중심지로 활동하던 아랍인들은 사실상 독립하여 시칠리아를 장악했다. 아랍인들의 중요한 거점은 메시나였다. 메시나를 동지중해 진출의 기지로 삼았는데, 튀니지 출신 아랍인 해적들의 소굴이 된 것이다. 아랍 해적들은 이탈리아반도, 스페인 해안, 남부 프랑스, 스위스까지 진출하여 괴롭혔다. 지중해는 이슬람제국의 활동무대가 되면서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밀려나게 되었다. 중세 유럽은 폐쇄적이고 자연경제적인 봉건사회였는데, 이슬람제국은 노르만족과 함께 유럽을 봉건사회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베니치아와 제노바는 국운이 걸렸기에, 교역의 지속을 위해 무슬림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 삐렌느라는 인물은 게르만족의 침략 보다 아랍 무슬림들의 지중해와 그 주변지역의 점령이 유럽 역사의 방향을 바꾼 중요한 사건이라고 언급한다. 전자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이 없었지만 후자는 지중해세계와 그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노르만족의 침략에 대해 알아보자. 4세기 말엽부터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게르만족은 중부 및 동부 유럽에 거주한 중게르만족과 동게르만족이었다. 북게르만족은 유럽을 압박함으로써 이슬람세계와의 투쟁력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남쪽과 북쪽에서 압박 받은 유럽은 갇혔고, 지중해세계에서의 힘의 구도가 바뀐 것이다. 서구중심적 사관에서는 이슬람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은 기독교세계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중해와 북아프리카가 이슬람에 넘어갔는데, 중세유럽의 기독교세계는 이를 11세기에 십자군운동으로 응징한다.
2. 유럽 기독교세계의 대반격 : 8차례에 걸친 십자군의 원정
지중해의 주도권을 빼앗긴 중세 유럽사회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중엽에 안정 속에 성장을 이룩했다. 봉건제도는 왕권는 약화시켰지만 봉건귀족의 힘을 신장시켰다. 적어도 군주체제를 유지해서 혼란상태를 야기시키지 않았다. 교황권의 신장과 함께 교황청의 영향력도 성장했다. 십자군운동의 직접적 원인은 교황 우르반 2세의 야망이었다. 그 야망은 십자군운동을 통해 기독교세계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신장시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리스정교회를 로마카톨릭교회에 통합하려 했다. 즉, 기독교세계의 통일을 꿈꾼 것이다. 비잔틴제국의 니케포로스 포카스와 요아네스 치미스케스가 이루지 못한 이슬람세계를 겨냥한 유럽 기독교세계의 성전은 1096년부터 1291년까지 8회에 달하는 십자군원정으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1회 십자군을 제외하고는 거듭된 실패를 하였다. 1회부터 보자. 제1회 십자군은 영국과 프랑스 국왕의 동생들과 남이탈리아출신 등이 참가한 비교적 통일된 원정군이었다. 니케아, 에데사,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까지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십자군이 유럽으로 귀환한 뒤에는 예루살렘왕국마저 무너지고 만다. 십자군의 주력부대가 돌아간 후 티그리스강 유역의 이슬람세력 통합에 성공했고 1144년에 에데사를 회복한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참가한 2회 십자군은 거의 전멸했다. 이슬람세력의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켜서 유럽은 다시 세 번째 십자군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유럽을 대표한 국가의 군주들이 참가했다. 먼저 출발한 독일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십자군과 합세하여 아크레를 함락시키고서 살라딘과 조약을 맺고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자유왕래를 보장받았다. 독일 내부의 분쟁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노르망디 문제 등의 문제를 인노켄티우스 3세가 결속시키고 자신의 권위 확고를 위해 십자군을 발의했다. 그러나 단기적 이익을 위한 목적변질로 이집트가 아닌 비잔티움으로 공격했다. 결국 십자군의 비잔틴제국 장악은 이뤄졌다. 다시 5회 십자군은 다미엣타 점령후 나일강 범람으로 카이로 진격은 실패했고, 이어 다미엣타마져 빼앗긴다. 6회 십자군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주도했다. 프리드리히에 대한 불신과 프리드리히의 외교 몰두로 큰 전투는 없었다. 황제는 협상하여 예루살렘의 대부분을 회복하고 휴전도 성사시켰다. 투르크인들이 1244년에 다시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이슬람세계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 제7십자군은 프랑스의 루이왕이 주도했다. 다미엣타를 정복하지만 성왕이 포로가 되어 배상금 물고 풀려났다. 그 후 별로 성과를 못 거두고 8회 십자군도 주도했다. 성왕이 튀니스에서 병사했는데 바이바르스가 결국 아크레를 점령했다. 그러면서 십자군원정도 막을 내린다. 십자군전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고 한다. 원인은 오합지졸의 농민군, 원거리 원정, 지휘부의 갈등이다. 그 영향을 보자. 유럽 기독교도들의 십자군 운동은 성지탈환이라는 목적달성에 실패하고 갈수록 상업적 성격의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는 성공했다. 하나는 지중해를 되찾아 그들의 활동무대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교도의 기독교와 그 교도에 대한 적대의식을 북돋우고 증오감을 증대시켰다는 것이다. 지중해는 십자군운동으로 유럽인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교역로가 부활하면서 초기 상업자본주의적 사회로 이끌었다. 십자군이 남긴 것은 이슬람교도의 기독교 및 그 교도들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십자군 사이에서 동서의 융합 세계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나 목적변질로 인한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은 안타까운 기록으로 남는다. 십자군운동은 사실상 실패였고 많은 부작용을 남겼다. 평가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기 마련인데, 긍정적 평가는 십자군을 이상주의신앙영웅주의의 발현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부정적평가로는 십자군을 무익한 낭비였고 종교적 불관용과 박해를 자극했고 동유럽의 기독교도들을 더 큰 곤경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질적세속적으로 변해갔다는 말을 덧붙여 설명한다.
3. 이슬람세계의 재공격: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비잔틴제국 정복
이슬람세계의 주도권을 잡은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1453년 비잔틴 제국을 정복했다. 15세기 중엽에 다시 동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제압했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은 로마제국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했지만 국력은 모자랐다. 유스티니아누스대제시대에 제국을 건설했지만 이후 현저히 쇠약해지며 동북쪽의 적에게 공격을 받는데 주로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족이었다. 7세기 이래 잦은 전쟁을 치뤘고, 10세기말경에 일시 중흥기를 맞이하지만 11세기말에 셀주크 투르크족이 주적이 된다. 셀주크투르크 족의 소아시아로의 진출 이후 비잔틴 제국은 위축되었고, 오스만 투르크족은 결국 비잔틴제국을 붕괴시킨 것이다. 13세기 말경에 오스만 투르크족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소아시아지역으로 진출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일부 그리스계 주민들을 끌어들인다. 투르크족은 광신적인 무슬림으로 안보였기에 융합이 다소 이뤄졌다. 후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비잔틴제국에 우위에 있는 입장에서 조약을 맺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무슬림들은 비잔틴제국을 결국 1453년에 정복해버렸다. 비잔틴제국이 기독교세계에서 이슬람세계로 바뀌어짐에 따라 기독교문화 유산의 운명도 바뀌었다. 성소피아성당 및 기독교사원은 아니지만 파르테논신전이 이슬람제국 아래서 많은 수난을 겪었다. 비잔티움을 함락시킨 후에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발칸반도도 장악했다. 이렇게 당했던 비잔틴제국을 산업과 군사력과 문화에서 보자. 산업에서는 13세기 이후에는 허약했지만 봉건적 서유럽에 비해 경제적문화적으로 번영했다. 당시 지중해세계의 산업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중요 산업은 국가 길드의 규제를 받았다. 상업도 국가의 통제 아래에 두어 상인은 많은 규제를 받았고 그럼에도 지중해에서 활발한 교역활동을 했다. 비잔틴제국이 적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은 건 군사력 때문이었다. 특히 ‘그리스의 불’은 대단했다. 제국의 문화도 굉장히 발전하고 번성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비잔틴제국을 역사적 공헌에서 보자. 동쪽에서 이슬람제국의 확장을 막아서 서구 기독교 세계를 보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잔틴의 그리스인들은 고전을 보존 및 복사하고 연구했다. 고전의 보전이 굉장한 역사적 공헌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비잔틴제국은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역사적 역할도 수행한 것도 중요하다.
4. 가톨릭교 신성동맹의 오스만 투르크제국 응징: 레판토해전
다시 유럽의 기독교세계가 이슬람세계를 응징할 차례였다. 신성동맹이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해군을 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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