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역사에서 차지하는 박형룡의 역사적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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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교회 역사에서 한 인물이 영향을 미친 측면에서, 죽산(竹山)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박사를 능가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보수적인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박형룡이야말로 신학의 정초를 놓고 신학교육과 저술을 통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신학자요, 교육자요, 그리고 저술가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기 시작한 이래,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장로교회에 있어서 신학적 중심축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의 신학사상과 저술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제자이자 동역자였던 정암(正岩) 박윤선(朴允善, 1905-1988) 박사의 출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즈음에 두 분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신학적 고찰은 매우 시의 적절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본고에서는 박형룡의 신학적 입장이 확고해지도록 기반을 조성했던 구 프린스톤 신학(Old Princeton Theology)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며, 그를 통하여 한국의 상황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추적하면서 그의 사역과 신학이 한국교회사에 미친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다.
I. 박형룡의 성장과정과 기독신앙
먼저, 박형룡이 신학에 입문하기 전까지의 성장과정과 교육배경,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는 경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는 1897년 평안북도 벽동군의 한 작은 읍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유교식 서당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당시의 서북지역은 어느 지역보다도 서구의 신학문을 받아들여 유교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공감하는 자들이 많았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 주된 이유로는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중산층”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능동적인 수용태도가 강했고, 어느 지역보다도 만주를 통해 기독교 복음이 일찍이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박형룡도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당시 조선의 현실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붕당분쟁의 폐풍으로 인하여 나라의 쇠퇴가 가속화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형룡은 “서당 선생님의 인솔 아래 교회에서 연설 배우러” 간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소년 박형룡이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를 통해서였다.
박형룡 형제에게 큰 감명을 준 조선인 선생은 김익두 목사였으며, 1910년 무렵에 일어났다. 회심하게 된 것은 신유은사 집회로 널리 알려진 김익두의 집회에 참석한 것을 통해서였다. 이와 같은 일은 박형룡이 십대 소년 시절에 일어났으며, 그의 신앙성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심각성, 그리고 지옥의 실재성, 또한 성령론 및 세대주의 종말론 등의 영향이 어린 소년 박형룡의 마음에 각인된 중요한 신앙적 특성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후 박형룡은 미 북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로 선천에서 활동하던 계인수(C. E. Kearns)가 세운 벽동읍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 교회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로 유명하던 최봉석이 조사로 시무하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며, 부흥일로에 있었다. 소년 박형룡은 그 교회에 7년 간 출석하였고 후에 최봉석 목사로부터 학습을 받는 등 적지 않은 신앙훈련과 함께 영향을 받았다.
어린 시절 박형룡의 초기 신앙의 유형은 최봉석과 김익두 목사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은 매우 자명하다. 성경의 권위에 토대를 두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천국을 강조하고, 전도와 성결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전형적인 복음주의적 신앙이 바로 박형룡이 회심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접했던 주요한 특성이었다. 김익두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신유 은사 집회로 이름을 드높이던 부흥사로 활동하였고, 최봉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면서 전도에 지대한 열정을 쏟아 부었던 전도자였다. 또한 그들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박형룡도 3.1 운동 당시 숭실학교 졸업반이었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학생을 동원하는 일을 맡아 참여했으며, 결국 숭실학교를 설립한 배위량 선교사의 집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1920년에는 숭실전문학교에서 매년 주최하는 전국 순회부흥전도대의 강사로 초빙되어 “천(天)의 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우리 민족이 범죄하여 일제라는 검을 통해 징계를 받고 있으니 회개해야 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설교 중에 불온한 내용이 있다하여 박형룡은 목포에서 검거되어 약 10개월 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렇게 망국의 현실 속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는 박형룡의 마음속에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신앙과 결부시켜 해결코자 하는 의도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1921년 목포 감옥에서 출감한 박형룡은 민족의 구원을 도모하는 것은 독립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라 믿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우선 중국의 남경 금릉대학교에 가서 1923년까지 2년 간 공부하고 학사학위를 마치자마자, 미국 프린스톤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원래 다른 학교로 유학 가려던 그를 소열도(Stanely T. Soltau) 선교사의 설득으로 프린스톤으로 향하게 되었다.
박형룡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 요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가 청년으로서 뜻을 품고 웅비하려던 1920년대와 1930년대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全)세계적으로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 위기의 원인은 바로 근대과학의 발달과 그 과학으로 인한 반(反)기독교적 함의 때문이었고 그 여파는 진화론, 성경 고등비평, 신(新)신학 등과 같은 도전으로 전통적인 신앙을 뒤흔들고 있었다. 또한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사조들이 한국사회 내로 유입되어 기독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고, 일제의 식민통치는 더욱 악랄해지고 있는 가운데 위기의식이 점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박형룡은 그의 신학을 보다 체계적으로 확립해 나갈 수 있는 과정을 미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요람이었던 프린스톤신학교에서 밟게 되었다. 박형룡은 프린스톤에 유학 오기 전에 이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선교사들과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신학적 입장에 의해 어느 정도 기반이 조성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미국 복음주의가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의 논쟁을 거치기 이전에 보유했던 신학적 특성을 상당부분 유지한 채, 구 프린스톤 신학을 접하게 되었다.
II. 구 프린스톤 신학교 유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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