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 제주도민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다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4.24 / 2015.04.24
  • 4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제주도민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다
‘해양유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읽기 전에는 과거 제주도민들은 해녀들의 해양업과 농업을 기반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해양유민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되었다.
기존의 역사는 대부분 중앙 중심적이기 때문에 ‘유민’이라고 함은 ‘토지를 이탈한 농민’이라고들 정의하는데 시대가 발달하며 여러 학자들이 이러한 기존의 관념을 탈피해 새로운 접근을 통하여 ‘해양유민’이라는 개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두모악, 두무야지, 포작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던 과거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생업인 농업이 아닌 해산물 채취와 해상무역을 통하여 삶을 일구어나가는 백성들을 해양유민이라 하는데, 제주도민들이 특히나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과거 제주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에 적합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해산업과 상업을 위주로 삶을 살아가는데, 제주도의 인구는 고려 초 까지만 해도 그 숫자가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 말 원나라에서 제주도에 말을 방목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 수가 급증했다. 제주도는 목마의 적지였기 때문에 원나라의 국립목장 중 하나로 까지 성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에도 제주도의 말 산업이 다른 지역보다 더욱 발달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목마 산업이 부흥할수록 정부에서의 수탈은 점점 심해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진 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고려 말 제주의 목마 경제가 번성하자 정치권력이 작용하게 되는데, 원나라를 몰아내고 새로운 동북아의 패권자로 등장한 명나라에서도 제주 땅에 형성된 경제적 가치가 있는 말을 탐내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고려의 관리가 제주에 목호들에게 말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난(亂)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보다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한 조선이 건국되었고 조선 중앙정부는 서서히 제주도에 잔존해있는 자치권력 격인 토호세력을 벼슬 등으로 약화시키고 제주 경제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조선 정부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주에도 공납을 바치게 하였으나 앞서 말했듯이 제주도의 토지는 척박하여 농업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도민들이 특히 힘들어 하였다.
제주도는 왜구의 침범이 잦았던 지역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리들이 무관 출신이었다고 한다. 무관 출신 관리들을 폄하 하는 건 아니지만 문관 출신보다는 무관 출신들이 탐학과 과다 수취의 대명사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문관이든 무관이든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들이 다 부패했었으나, 단지 문관들이 자신의 비리를 무관들 보다 잘 숨겼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와중에 조선 정부는 말 교역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15세기 제주도의 말 산업은 생존을 담보하는 결정적 경제 수단이었다. 이러한 통제는 제주 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조치였고, 제주도의 경제구조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에 제주민들은 우마 도살을 통해 ‘우마피’, 즉 가죽을 교역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허나 정부는 이마저도 강경하게 처벌하며 ‘우마적’이란 표현이 생겨나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수단을 강구한 백성들에게 도적이라는 표현을 쓰며 억압했던 조선 정부가 너무 과했다고 생각한다. 정부에서 백성들에게 규제를 하고 그 규제를 통한 이윤을 가져가기 위한 이러한 행위들은 과거일수록 더욱 심했을 것이고, 현재에도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해양유민의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들은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등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일정하지 않은 거취 생활을 했다. 이들의 항해실력은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중국, 일본에서 까지도 생활했다고 한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일본인 학자가 본 제주인의 삶 = 관념탈피의 고찰,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생존을 위한 도민들의 삶
  • 제주도민들이 도항을 하게 된 계기에는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는 여러 과거 배경들의 연계를 통한 결과였다. 특히나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건, 지난 번 ‘조선시대 해양 유민의 사회사’에서 느낀 바와 같이, 이 책 133페이지에 언급한바와 같이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한 행동을 취한 것이다.노리코 학자가 연구한 논문과 제주도민의 모습은 내게 과거 내가 알지 못했던 제주도민들의 행위에 대한 많은 역사적 배경을 알게 해주

  • [사학] 친일파 99인 자료
  • 조선 순검들이 이들을 급히보호하여 위험에서 면하였다 한다. 이런 위험 속에 일본에 건너간 권중현은그 해 12월에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고, 1908년에는 다시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1910년 병합 때는 58세의 나이로 자작을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일제시대에는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내는 등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냈다.■ 서영희(서울대 강사한국사)참고문헌鄭喬,大韓季年史大村友之丞,朝鮮貴族

  • [독후감]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를 읽고
  •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해안가 마을을 약탈하는 해적이 되기도 하고 왜적의 수군이 되기도 한다. 가난이란 제주인을 따라다니는 숙명같은 것이었을까? 가난을 피해 바다위로 도망쳤어도 그들은 생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마을의 약탈자가 되기도, 왜적의 수군에 가담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 이어 민중들의 삶을 다룬 책이었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과 마찬가지

  • 제주역사 유적 현장답사 보고서
  • 제주도의 역사지를 답사할 수 있어 너무 뜻 깊었다. 제주도민이 아니라서 제주 역사에 대해, 실제적 이야기보다 이론이나 책으로만 봐 왔다. 그런 제주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교수님을 통해 자세하게 들으니 이제야 그 삶의 방식과 문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힘들이지 않더라도 바로 근처에 찾아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던 사실에 안타까웠다. 사회사를 계기로 하여 제주 역사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많은

  • 독후감 -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를 읽고
  • 조선시대에 주요통치 논리 중에 하나였던 농본사상(農本思想)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농본사상(農本思想) :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통치이념으로 농업을 산업의 기본으로 삼는 사상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 ․ 농 ․ 공 ․ 상이라는 신분순위를 정해놓고 농업을 중요시하고, 백성의 복지를 증진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농업에 중점을 두고 기본 행정과 통치를 하여왔기 때문에 주류에서 소외된 해양업 등에는 그 만큼 관심을 갖지 않았고, 필요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