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화, 그 첫번째 무오사화 - 연산군(燕山君)과 사림파(士林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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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림의 화, 그 첫번째
: 무오사화(戊午士禍)
목차
Ⅰ. 머리말
Ⅱ. 무오사화의 배경
(1) 연산군(燕山君)과 사림파(士林派)
(2) 훈구파(勳舊派) 유자광(柳子光)과 사림파 김종직(金宗直)의 관계
(3) 훈구파 이극돈(李克墩)과
사림파 김일손(金馹孫)의 관계
Ⅲ.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인한
무오사화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요즘 ‘간신’이라는 영화가 흥행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연산군 시기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배경으로 하여 사림이 화를 당하고 연산군이 폭정을 하는 내용이 전개된다. 영화를 보고 사림이 화를 당하게 된 배경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것인데, 일단 대략적으로 살펴본 갈등상황은 이렇다. 성종 대 왕실 안에 불안한 사태 11년 11월 계비 윤씨의 책립, 성종 13년 8월 윤씨 사사, 성종 14년 3월 정희왕후의 승하 등.
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세조, 성종 때 공신세력인 훈구파가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과전, 공신전을 기반으로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작록(爵祿) 관작(官爵)과 녹봉(祿俸)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을 대대로 누려 왔다. 강은혜, 「연산군대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 사화 : 무오,갑자사화를 중심으로」, 명지대학교, 2012, p.14.
또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하면서 정치주도세력이 될 수 있었다. 훈구파들은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당한 행위를 많이 하였는데, 이들 훈구파가 국정운영에서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방해한 세력이 있었다. 바로 사림파(士林派)라고 불리는 세력이었다.
사림들은 자신들을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라 자부하고 의리와 결백을 신조로 하는 학자였으니 만큼, 단종을 죽인 세조를 옹립 임금으로 받들어 모심.
하여 권세를 자행하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있는 훈구파를 멸시하였다. 사림은 언론직에 진출하면서 훈구의 잘잘못을 가리고 비판하면서 자연스럽게 훈구파에 대응하게 되었다.
이것이 갈등으로 번져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네 번의 갈등을 일으켰는데, 이 갈등을 ‘사화(士禍)’라고 한다. 사화는 일으킨 훈구파 쪽에서는 난으로 규정하였으나, 당한 쪽인 사림파 쪽에서는 사림이 죄 없이 당한 화라고 주장하여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던 끝에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 초반 무렵부터 사화라는 표현이 직접 쓰이기 시작했다. 한국인물사연구원,『핏빛 조선 4대 사화 첫 번째』, 타오름, 2010, p.16.
이렇게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략적인 갈등상황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4대 사화 중 처음 일어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의 원인을 잘 보여주는 사건인 ‘무오사화’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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