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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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관

2. 실록 편찬의 유래

3. 실록의 체제와 기술 내용

4. 실록의 편찬

5. 사관

6. 실록의 보관

7. 역사기록의 어려움

8. 실록 편찬과정에서 사초의 수정

9. 완성된 실록의 수정
본문내용
1. 개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합쳐서 부르는 책 이름이다. 즉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으로부터 《철종대왕실록(哲宗大王實錄)》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기획하여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대 조정에서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편찬한 것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실록에는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의 주도로 편찬된 《고종태황제실록(高宗太皇帝實錄)》과 《순종황제실록(純宗皇帝實錄)》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 규례에 맞게 편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 심하여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 성격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조실록(李朝實錄)》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실록》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와 같이 ‘일기’라고 한 것도 있지만, 그 체제나 성격은 다른 실록들과 똑같다. 대부분 왕대마다 1종의 실록을 편찬하였지만, 《선조실록》《현종실록》《경종실록》은 만족스럽지 않은 면이있다고 하여 후에 수정(修正) 혹은 개수(改修) 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 《광해군일기》는 인쇄되지 못한 정초본(正草本: 鼎足山本)과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이 함께 전하는데, 중초본에는 최종적으로 산삭한 내용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많은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대부분 목활자로 인쇄한 간본(刊本)으로 되어 있지만, 정족산본(鼎足山本)의 초기 실록 및 두 본의 《광해군일기》는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현재 남한에는 정족산본 조선왕조실록 1,707권, 1,187책과 오대산본 27책, 산엽본 등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태백산본 실록 1,707권, 848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에는 《훈민정음》 2본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된 책이므로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으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하였다. 이 국역본은 신국판(新菊版) 413책으로 간행되었으므로 이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를 보다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1995년에 서울시스템(2003년에 솔트웍스로 개칭) 한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가 전질을 전산화하여 CD-ROM으로 제작 보급하였다. 한편, 북한의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이용하여 1975년부터 1991년까지 국역사업을 추진하여 총 400책의 국역실록을 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일본으로 가져간 오대산본 실록은 관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으나 잔존본 74책 가운데 27책(중종실록 20책, 선조실록 7책)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동경대학 종합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47책(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은 현재 반환되어 보관장소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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