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해방 전후의 여성운동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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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의 여성운동에 대한 고찰
가부장적 가족제도 하에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개인적˙사회적 지위 역시 전혀 보장받지 못한 채 인습과 봉건적 사회관념 속에서 무시당하고 핍박받던 여성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적, 계급적 억압, 성적 억압 등 다중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특히 한국적 유교 사회에서 가정 내의 일상사는 주로 여성의 전담이고 가정 밖의 일- 생업에 관한 것에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는 전적으로 남성의 몫이었다.
그러나 근대 사회로 전환하는 시대적 조류와 더불어, 서구 문물이 도입되고, 근대 교육을 받은 부르주아 엘리트 계층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여성운동이 싹트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여성운동과 여성의 초기 사회진출을 가능케 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으로는 우선 동학사상이나 개화사상과 같은 근대 사상의 대두 및 발전이다. 또 서양의 기독교 여성 선교사들이 활발한 전도 및 계몽운동을 벌임으로써 근대적 여권 운동이 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여성 자체 내에서도 권리를 찾기 위한 자각이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었던 1905년 이후에 그런 내적 태동은 더욱더 폭넓은 사회적 인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시기 여성운동은 순수하게 여성해방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사회적 여건과 민족적 필요에 의해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또 대부분이 선구적 남성 개화파 인사들의 적극적 지지와 후원 하에 여성의 근대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05~ 1910년의 애국계몽 운동은 국가 존망이 걸린 위기를 극복하고 완전한 주권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국민의 절반을 이루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던 시기였다. 그 결과 여성교육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었으며, 아울러 여성 교육단체와 여학교가 설립되고, 여성 계몽을 위한 잡지나 서적 등의 간행도 활발히 간행되었으며 곳곳에서 여성을 위한 강연회나 강습회가 잇달았다. 이 시기에 전라도 지방 유지이셨던 외할머니의 선친께서는 여자도 충분히 배워야 할 시대라는 주장에 크게 동감하시고 딸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 하고 학교에 보내고자 하셨다. 이즈음 장지연은 여성교육을 위한 일종의 교재로 ‘여자독본’을 간행하였는데, 이 ‘여자독본’하권에서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와 같은 애국, 애족적이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서구 여성 10명을 75면의 지면을 할애해 다루고 있다. 이는 세계사 속에서 여성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와 위치를 강조하는 것이며, 이를 읽음으로써 당대의 여성들은 시대가 원하는 애국적 여성상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이전의 세대였던 외할머니의 선친께서는 여성이 맡은 일은 집안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한다는 가부장제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가졌다. ‘여자독본’에서 장지연은, 가정교육의 책임은 전적으로 집안의 주부에게 있으며, 가정에서는 반드시 주부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외할머니의 선친 역시, 남자들은 밖에 나가 여러 사업을 행하므로 가족의 안위는 전적으로 주부의 손에 맡겨지게 되는 바, 주부의 책임이 크므로 여자 역시 공부하여 자녀 교육과 주부로써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계의 단순한 구성원에서 가정을 책임지는 중요한 구성원으로 주부의 역할이 한층 격상되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초 여성 교육의 태동은 유의미하다.
여성교육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은 교육단체의 결성 및 학교 설립과 같은 적극적인 형태로 가시화된다. 이 시기 활동했던 여성 단체 수는 서울과 각 지역을 합하여 30개가량 되는데, 서울에서 조직되어 활동했던 단체가 규모나 내용 면에서 알찬 편이었다. 서울의 경우 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양정여자교육회, 대한여자흥학회, 한일부인회, 자선부인회, 동양애국부인회, 자혜부인회 등이 있었는데, 개중에는 친일 여성단체들도 있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평범한 부녀자들이 아닌, 왕실과 고위 관료, 친일적 인사 등 상류층 계급이었다. 당시 황실의 순헌황귀비 엄씨(명성황후 민씨가 을미사변으로 숨진 후 엄황후라 불림)는 여성교육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는데 황실 여성들과 관료 부인들을 규합해 조직한 단체가 곧 대한여자흥학회와 자혜부인회이다. 전자는 1908년에 설립된 한성관립고등여학교를 후원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경성고아원을 위한 자선 단체의 성격을 가졌다. 즉, 이 시기의 여성운동은 전 계층을 아우르기보다는 일부 상류층 여성의 전유물이었다고 본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여성이 주체가 된 국권회복운동으로, 구국운동에 여성들의 평등한 참여를 주창한 일대 변혁이었다. 비록 그 성격이 자주경제를 위한 일본 화폐 배척 운동이었으므로 과정이 결코 순탄할 수만은 없었고, 당초 기대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을 통해 항일 자주의식이 강화되었고, 일제의 압박에 저항하는 전국적 의지를 보여 준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또 여성운동의 시각에서 보자면 국가적 운동을 여성이 독자적으로 참여하고, 나아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여성운동사에서 일대 전환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항일 민족운동의 분수령이라 할 만한 3.1운동에서 여성들은 준비 단계서부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였으며 운동의 전국적 확대 과정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 만주 지역에서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선언되었으며, 전적으로 여성들에 의해 작성되어 반포된 이 선언문은 ‘대한독립선언서’와 내용 면에서 상당히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 3.1운동 자체에 있어서도 선언서의 전달과 인쇄, 태극기 제작, 배포 등 중요한 부분을 여성들이 전담하였다. 3.1운동의 사각지대였던 개성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어 낸 어윤희, 3000여 명의 천안 아오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해 이끌어냈던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 대구와 부산에서 일대 만세시위를 선도한 여교사와 여학생들, 해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기생들 등 여성들은 3.1운동의 주역 그 자체였다.
1927년에 발족된 근우회(槿友會)는 최초의 전국적 여성운동 조직이라 할 수 있다. 근우회는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기치로 내걸고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 교육의 성별 차별 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여성에 대한 봉건적 사회적, 법률적인 일체의 차별 철폐, 일체의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 및 결혼, 이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2주간의 휴양과 임금 지불 등의 내용을 강령으로 하였다. 그러나 점차 내부의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의 분열이 심화되고 192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난 이후 서울지역의 학생운동 지도에 관련하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위축되고 곧 조직이 와해되고야 말았다.
외할머니께서 거주하던 전남 지방은 일제의 수탈이 그 어떤 지역보다 가혹하였다. 전통적인 곡창 지대라 농산물의 산출이 많았기 때문에, 경제적 수탈과 착취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남 지역에는 일본이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일찍이 진출하였고, 일본인 지주, 친일 인사들의 전횡이 극심하였다. 또 일제의 차별과 우민화 교육은 극에 달하였는데 학교에서 일본 역사만을 가르치는가 하면, 우리 역사를 왜곡시키기도 하였다. 또 일본인 선생들은 교내에서 우리말을 쓰면 체벌을 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의 횡포와 강압, 식민지 교육에 더 이상 참기 어려웠던 광주 지역 학생들은 항일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나가야겠다는 의미에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다. ‘성진회’는 이 중 하나로 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모체가 된다.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일제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절대 발대한다.’,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의 세 가지 강령을 정하였으며, 정기 집회일과 경비 충당을 일정하게 정하고, 비밀을 엄수할 것을 맹세하는 규약 역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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