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관계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의 진전과 협상 북일 관계 개관 북일수교 쟁점 북일 과거사 처리 문제 북일 관할권 문제 북일 국교정상화 회담 1990년 이전 북일관계 가네마루 방북 3당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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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 일 관 계
-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의 진전과 협상 -
Ⅰ. 북일 관계 개관
북일 관계는 냉전이라는 국제적 조건과 남북한의 군사적인 대치라는 상황 속에서 해방 이후 근 반세기간 공백상태로 방치되어 왔다. 그러나 1989년 이래 동서 냉전구조가 붕괴되고 한국의 북방정책이 가시화되는 한편 남북한 관계가 개선의 조짐을 보이는 상황이 전개되자 북일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金丸信) 자민당 부총재와 다나베 마코토(田邊誠) 사회당 대표가 이끄는 자사 대표단의 방북이 실현된 것을 계기로 북일 간에는 수교를 위한 본격적 교섭이 전개되었다. 1991년 1월부터 약 2년에 걸쳐 이루어진 정부간 수교교섭은 북한 핵 개발 의혹과 이른바 납북의혹을 받고 있는 일본인 ‘이은혜’ 문제가 제기되면서 결렬되었다. 그 후 북일 수교교섭은 중단상태에 있다가 2000년이 되어서야 재개되어 세 차례에 걸쳐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2002년 들어 북일 수교교섭은 다시금 재개되었는데 그것은 전격적인 북일 정상회담이 물꼬를 트게 됨으로써 실현된 것이었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수상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과의 북일 정상회담을 갖고 납치의혹 문제, 과거사 청산, 안전보장의 3대 현안에 대해 큰 틀의 합의를 실현시켰다. 이에 따라 양 정상은 북일 수교교섭의 조속한 재개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였고 이는 북일 평양선언에도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합의에 의거하여 2002년 10월 콸라룸푸르에서 재개된 제12차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은 때마침 불거져 나온 북 핵 의혹파동으로 말미암아 별다른 성과 없이 종료되고 말았다.
Ⅱ. 북일수교의 쟁점
1. 과거사 처리 문제
북한은 교섭 당초 항일빨치산 투쟁을 일본과의 교전 상태에 있었던 증거로 간주하며 교전 당사자로서 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 바 있다. 북한은 회담의 나중 국면에 가서는 교전 당사자로서의 배상 요구 대신에 식민지 지배가 야기한 피해에 대한 넓은 의미의 ‘인도적 보상’을 요구하는 선으로 양보하였다. 이러한 입장 변화는 당시 정신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던 한국 민간단체들의 주장에 보조를 맞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측은 이를 일본 측 입장과 종래 북한 측 입장 사이의 ‘제3의 길’로서 일정한 진전으로 평가한 바 있다.
북한은 수교 교섭이 일본측의 완강한 자세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사죄와 보상 문제 등 현안을 뒤로 미루고 우선 국교부터 수립하자는 입장으로 후퇴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1973년도 중일국교정상화 당시 중국이 취한 방식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은 경제협력 방식을 취함으로써 보상 내지 청구권 방식보다 훨씬 많은 경제지원을 받아 내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수교 교섭 과정에서 일관되게 한일합방조약 등 구한국과 일본이 맺은 조약은 합법적으로 체결된 것이라 주장하며, 1965년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처럼 ‘청구권’ 방식에 따른 해결을 주장하였다.
한편 수교 교섭의 계기가 된 90년도 조선로동당, 일본자민당, 일본사회당의 3당 공동선언에서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 뿐 아니라 전후 45년간 북한 ‘인민’이 받은 손실에 관해서도 공식적으로 사죄를 하고 충분히 보상해야 함을 명기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북일 교섭에 임하는 기본 입장으로서 ‘전후 보상’에 대해서 일체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수교 교섭 당초 전후 보상도 강력하게 주장하던 북한은 도중에 전후 보상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않게 되었다.
2. 관할권 문제
북한은 당초 ‘조선은 하나’라는 원칙을 견지하되, 관할권 문제는 남북한 간에 해결해야 할 민족내부 문제이지 일본이 관여할 성질은 아니라는 논리를 주장하며 북일 교섭 의제에서 제외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나중에 가서 북한은 “조선은 하나이며 우리는 평화적 통일에 전력을 다 한다” 고 하면서도 “바람직한 현실은 아니지만 우리 주권은 조선반도의 절반밖에 미치지 않는다” 고 인정하였다. 여기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란 국제적 정세가 작용하고 있었다. 나아가 북한은 자신의 관할 범위가 “군사경계선 이북”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북한 측의 입장 표명에는 당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 라는 현실이 작용하고 있었다. 다만 북한 측이 회담에서 보여 준 현실적인 발언은 북한 공식매체에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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