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최후의 날 종교 재판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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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최후의 날
종교 재판의 마지막 날
종교 재판은 13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교도를 처단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에서 처음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곳의 종교 재판은 스페인의 종교 재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처럼 끔찍했던 스페인의 마지막 종교 재판은 1834년 7월 15일에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수많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그들 교회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일부 세속적 권력 기구는 이러한 이단을 처벌하라는 교회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229년과 1231년 사이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이단의 혐의가 있는 용의자들을 조사하고 그들로 하여금 입장을 철회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종교재판소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이 재판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 등지에서 열린 임시 재판소들을 모두 아울렀다. 그런데 이 재판소는 15세기에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소로 대체되었다. 스페인 종교 재판소는 1478년 교황 식스투스의 포고령으로 재가를 받았으며 1480년에 설립되었다.
스페인 종교 재판소는 당시 재판관의 권력 남용과 재판 과정의 불공정성 그리고 심문, 처벌 및 처형 과정의 잔인함으로 전 세계인의 비난을 받았다. 종교재판은 정기적으로 공개 행사로 열렸다. 이 재판은 ‘오다페(진실의 행동들)’ 라 불렸는데, 행진에 이어서 미사가 진행되었고 이 미사 과정에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주장하며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화형에 처했다. 여기에는 가톨릭을 버린 사람들 뿐 아니라 가톨릭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도 포함되었다.
16번째이자 마지막 사설 재판이던 스페인 종교재판이 1640년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그러나 17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종교재판의 권위는 힘을 잃었다. 포르투갈의 마지막 오다페가 1765년에 열렸고 , 프랑스의 마지막 종교재판은 1772년에 열렸다. 계몽과 진보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포르투갈의 마지막 종교 재판이 1821년에 열렸다. 그리고 악명 높던 스페인의 종교재판도 1834년 7월 15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2세가 종교재판소의 모든 관리를 해고하고 전 재산을 국고에 귀속했기 때문이다.
오다페 auto de f (포르투갈어auto-da-f는 신앙 행위라는 뜻)
스페인 종교재판소 앞에서 판결을 낭독하던 공적인 의식. 최초의 판결선고식은 1481년 세비야에서, 마지막은 1850년 멕시코에서 있었다. 갈수록 정교하고 웅장해진 이 의식들은 대개 도시의 광장에서 왕이 참석한 가운데 집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용은 긴 행렬, 엄숙한 미사, 종교재판소에 대한 복종 선서, 설교, 판결문 낭독으로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과거에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였다가알룸브라도파(단죄받은 신비주의운동 추종자들)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중혼과 마법 같은 죄목으로 고소당한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종교재판소가 선고할 수 있는최고형은 종신형이었고, 사형은 국가권력만이 선고하고 집행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판결선고식에서 단죄당한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세속 권력에게 넘기는 경우는 없었다.
종교 재판에 대한 마지막 기록
1229년~12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프랑스와 독일에 임시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였다.
12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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