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1922년 흑도회][1922년 흑우회][1922년 한인단체][동경동맹회][코민테른][태을교]1922년의 흑도회, 1922년의 흑우회, 1922년의 한인단체, 1922년의 동경동맹회, 1922년의 코민테른, 1922년의 태을교 분석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3.07.28 / 2019.12.24
  • 8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5,0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목차
Ⅰ. 1922년의 흑도회

Ⅱ. 1922년의 흑우회

Ⅲ. 1922년의 한인단체

Ⅳ. 1922년의 동경동맹회

Ⅴ. 1922년의 코민테른

Ⅵ. 1922년의 태을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1922년의 흑도회

흑도회는 구성원의 다양한 성향으로 인해 조직적 활동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동우회 간부진의 참여로 노동문제 및 기관지 발간 등에 높은 의욕을 보였다. 우선 흑도회 활동방향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동우회선언’을 주목할 수 있다. 1922년 2월 4일《朝鮮日報》에 동우회 명의의「전 조선노동자 제군에게 고한다.」라는 글에서 이들은 앞으로 “일본의 주요 사상단체와 제휴하여 노동대학 설립, 잡지『同友』의 발행 등 노동운동을 전개하려하며 이제부터는 고학생 및 노동자의 단순한 구제기관이 아니라 직접적인 계급투쟁기관이라는 사실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김약수, 박열 등 11명이 연서한 이 선언문은 동우회를 친목적 노동단체에서 계급투쟁 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뜻을 표방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연서자인 김약수, 김사국, 박열, 원종린, 임택용 황석우 등은 이미 흑도회에 가입한 상태였으며 홍승노 등도 관련인물이다. 이들이 밝힌 사업계획 중 노동대학 설립은 大杉榮의 ‘平民大學’을 염두해 둔 것으로 보이지만, 기관지는 흑도회의『黑濤』지 발간으로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동우회는 내부진통을 거쳐 순수 노동단체로 남아 있다가 1923년 5월 제 4차 메이데이행사 이후 자연 소멸되었다. 때문에 ‘동우회선언’은 동우회 명의로 발표되기는 했지만, 노동단체의 한계를 절감한 간부진들이 흑도회에 가입 후 향후 활동방향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김명섭 : 흑도회의 결성과 활동(1921년-1922년), 단국대학교사학회, 1998
김명섭 : 흑우회의 활동과 이념, 1922년-1927년, 한국역사연구회, 1999
김인덕 외 2명 : 1920년대 이후 일본·동남아지역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성주현 : 1920년대 초 태을교인의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1
정혜경 : 대판 한인단체의 성격(1914년-1922년), 한일관계사학회, 1995
최규진 : 코민테른의 기억과 현실 정치, 경상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 2010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한국사 요약정리
  • 동맹회(비밀결사)- 조선유학생학우회(합법단체: 학지광 발표)- 조선학회(웅변대회: 정치적 계몽)- 1919년 2 8 독립운동 기반# 국외 민족운동의 평가- 독립군 기지건설운동의 한계: 국내 독립운동가 체포, 독립자금 전달되지 못함- 국외 망명 독립운동가들 노선 대립: 191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 한계 직면3 1 독립운동1. 시대적 배경- 민족자결주의 허구성 노출- 신한청년당: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파견: 독립 호소- 국내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계획

  • [재일]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성격, 현황,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도일사, 산업진흥론, 재일한국인(재일조선인, 재일한인, 재일유학생)의 민족운동, 사상단체
  • 1922년 11월부터 日本共産黨의 추천에 의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遠東部 산하의 꼬르뷰로(高麗局) 성원으로 들어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 공산진영은 12월 26일 東京 시내 모처에서 ‘北星會 結成’의 행사를 치른 후, 1월초부터 宋奉禹의 주간 아래 기관지 ꡔ斥候隊ꡕ를 발간하였다. 이어 4월 17일에는 朝鮮靑年會館에서 사상강연회를 열어 시위를 벌이는 등 공식활동에 들어갔다.북성회는 노동단체들을 지원하는 한편, 국내에 들어와 사회주

  • 재일조선인(재일유학생, 재일한국인, 재일한인)의 현황, 도일사, 재일조선인(재일유학생, 재일한국인, 재일한인)의 국적정책, 생활상태, 재일조선인(재일유학생, 재일한국인, 재일한인)의 사상단체, 민족운동 분석
  • 단체는 ‘토오쿄오조선노동동맹회’(1922년)이다. 이 단체의 탄생은 ‘오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1922년)의 결성을 촉진하였다. 이 두 단체를 바탕으로 그 외 각 지역에서 조직된 각종의 한인노동단체가 연합하여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하 재일노총)’(1925년)이 탄생되었다. 이후부터 재일노총이 해산할 때까지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재일노총의 주도하는 가운데 ‘재일본조선청년동맹’ ‘신간회 지회’ ‘근우회 지회’ ‘신흥과학연구회’

  • [한국근대사] 일제 식민지 시기 공산주의운동
  • 단체’를 처음으로 조직하였다. 이들은 조선노동공제회의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 3월 15일에는 서울에서 1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기 위한 공산주의자 발기 소그룹을 형성하였다. ② 한인사회당과 공산주의 그룹의 형성 하지만 대부분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기원은 ‘한인 사회당’으로 이야기된다. 한인사회당에 대한 논의도 여러 가지인데 먼저 창립과정과 시기를 살펴보면 한 분석은 1918년 6월 26일 하바

  • [사회변동] 신사상의 유입과 확산
  • 동맹회로 구성된 4단체 합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김약수를 비롯한 북풍회의 주요 인물들은 1925년 4월, 화요회의 주도 아래 결성된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북풍회와 화요회 사이에는 합동 뒤부터 반목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25년 9월 8일자 『조선일보 사설인 「조선과 노국(露國)과의 정치적 관계」를 둘러싸고 두 단체의 밀월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한편, 코민테른은 화요회 주도의 조선공산당을 정식 승인한 반면 북풍회와 서울청년회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