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의 생애와 사회주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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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박헌영의 생애
Ⅱ.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관련 활동
Ⅲ.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과 잡지《콤무니스트》
Ⅳ. 경성콤그룹 관련 활동
Ⅴ. 결론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박헌영의 생애

박헌영은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고,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창당 7개월 만에 대부분의 간부가 체포되어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때 체포된 그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나 소련으로 탈출했다. 소련에서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정치교육 과정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2년간 교육받은 후 1933년 다시 상해로 와서 《콤무니스트》라는 잡지를 만들어 국내에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했는데 이것이 꼬리가 잡혀 1933년 7월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다 체포되었다. 1939년 대구형무소에서 만기 출옥을 하고 고향 예산에서 건강을 되찾은 후, 김삼룡(金三龍)·정태식(鄭泰植) 등과 함께 세칭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 데 지도역할을 하였으나, 1942년 12월 일본경찰이 검거망을 좁혀오자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金成三)이란 가명으로 기와공장 인부로 취직하여 3년간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8월 19일 서울로 올라와 광복 다음날 결성된 장안파 공산당에 대항하여 8월 20일 김형선·이관술(李觀述)·김삼룡·이현상(李鉉相) 등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였다. 9월 3일 세칭 장안파와 재건파가 연석회의를 가지고, 이를 통합한 조선공산당의 중앙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46년 5월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으며, 조선 공산당은 이에 맞서 9월 총파업·대구 10월 항쟁을 일으켰다. 46년 11월 조선공산당·인민당·신민당 좌파가 연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 박헌영은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 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鐵山)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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