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의 사상 인물 조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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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서 론
竹山 조봉암은 1899년 9월 25일, 제국주의의 침략적 극단 세력이 한반도 상륙의 첫발을 닫던 강화도에서 반식민지 봉건사회의 빈곤의 극단점인 빈농가의 후예로 태어났다. 훗날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사상을 닦아 이름을 내고, 초대내각 장관에 오르며 국회의 부의장까지 지내게 되는 그가 대통령 후보에 올라 2위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당시로썬 입에 올리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평화통일론’을 주창하며 당시 국가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정면 대응했던 그의 사상적 당당함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결국 이른바 ‘법살(法殺)’이라 일컫는 재판을 통해 서대문 형무소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그의 행적의 바탕이 되어 주었던 사상의 뿌리와 그 가지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사상의 자유가 주어진 오늘날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 조봉암의 생애와 업적
1898년 인천 강화에서 출생한 조봉암(曺奉岩)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호는 죽산(竹山)이다.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를 거쳐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하여 문화부책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8 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박헌영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되었다. 그 해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3. 조봉암의 사상 전개 과정
휴머니즘과 내셔널리즘(인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궤적에서 영글어진 竹山의 사상은 철저한 개혁적 실천론이었으며 이상적 현실론이었다. 竹山의 사상의 성장단계는 제 1기 그의 20대인 1920년대, 제 2기 1930년대로부터 해방까지의 30대와 40대 전반, 제 3기 1945년 해방 이후로부터 민족의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40대 후반 50대의 기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竹山의 육체적 소멸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민주주의와 개혁론 그리고 평화통일론으로 부활되어 전개되는 竹山사상가의 물활기(物活期)를 덧붙일 수가 있을 것이다. 제 1기는 竹山사상의 맹아기로써 청년적 역동성으로써 당시 시대상황의 요구에 부응하는 안티 테제로서의 사회주의 사상, 민족해방투쟁의 가장 적의한 수단으로서의 혁명적 실천론 이었다. 제 2기는 竹山사상의 성숙과 심화기로서 혹자는 휴면기라고도 하나 죽산에게 있어서 정체와 나태는 그의 인생 사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제 3기는 정(正), 반(反)을 지양한 합일(合一)로서의 竹山사상의 완성기이며 그것은 건국 과정과 분단 지양의 통일과정 그리고 수구와 시폐를 혁파하는 새로운 공화제적 복지민주주의 민족공동체 사회모형의 실현을 위한 개혁적 실천론으로 전개되며 시대적 정합성과 사회적 보편 가치에 충실한 국민대중의 지지와 결집을 흡인해 내는 창조적 파괴력으로 역사의 순행을 거역하는 세력에게는 가히 전율적 공포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형성과 전개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어주는 사상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세계관에 있음을 피력하고 싶다. 竹山은 열살 때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고원 일을 그만 두고는 기독교 예배청년회 일을 보면서 교회 일을 열성적으로 다루게 되어 교역자로부터의 신뢰를 받고 권사라고 불리움을 받았다. 실로 기독교 세계는 竹山의 사상적 개화의 첫 물고를 틔운 것으로 사랑과 포용, 화해와 협력, 대화와 설득, 평화와 낙관, 참을성과 결단 그리고 인간애, 인인애, 민족애를 내화(內化)할 수 있었던 심층적 계기가 된다.
4. ‘竹山 개혁론’의 재조명
죽산 개혁론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치용(經世治用)의 현대 한국의 실학론(實學論)이라고 할 수 있다. 竹山 개혁론은 竹山 진보사상의 주체적 진화와 객관적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그 내용이 채워지며 연속적 계기적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竹山 개혁론의 구상과 실천적 전개는 대체로 다음의 세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1920년대의 죽산 청년기의 맹아적 사상기의 개혁 이데아이다. 그 둘째 단계는 해방국면을 경과하면서 건국 참여와 竹山 개혁론의 정책적 투입과 실천적 검정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1950년대의 의회활동과 대선투쟁을 통한 경제개혁, 정치개혁, 사회구성체 개혁의 마스터 플랜의 창출이었으며 그것의 추동력으로서의 진보당 결성과 강령 제시로 종합된다.
竹山 개혁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개혁론의 이상주의와 현실론의 통일이다. 이는 인간본성에 대한 신뢰, 사회진보에 대한 확신의 역사이행에 대한 낙관을 근저에 깔고 있음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둘째 개혁론의 방법과 동력의 통일이다. 竹山 개혁론은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통합적 추동이며 이는 주권재민론과 진보사회를 위한 이데올로기를 가치론의 기저로 하는 것이다. 「민중은 물이요 정부는 그 속에 사는 고기라, 민중과 정부는 물과 물고기와의 관계이다」라는 죽산의 강조는 동아시아 도가 사상과 전통적 한국사회의 개혁 노름(norm)의 동원을 제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사회 민중적 동력의 추동으로서만 개혁의 성공과 재생산을 담보해 낼 수 있다는 사회철학에서 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竹山 개혁론은 개방성과 정론(正論)적 담론, 그것을 통해 여과된 통합주의 성취를 목적론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이성과 합리주의를 존중하는 근대적 가치론에 충실하면서 절차적 일반민주주의, 의회주의, 정당정치, 법치국가의 궤도를 수호하고자 하는 것이며, 배타적 배제적 「제3의 길」과는 다른 중도주의적 수렴과 통합을 실현함으로써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구현코져 하는 것을 목적론으로 지향한다. 총괄적으로 이야기하여 竹山의 개혁론은 공화제 민주주의 제도(형식)와 한국적 진보사회로서의 복지공동체(내용)의 통일로 특징 지워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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