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시지와 조선의 산림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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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 고려시대 柴地의 分給
1) 시지 분급 목적
2) 시지 분급 지역
2. 조선의 柴地와 山林川澤
1) 寺社에 지급한 柴地
2) 양반층의 산림천택 사점
맺음말
본문내용
2) 양반층의 산림천택 사점
조선시기 양반층이 산림천택의 분할에 참여한 것은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국왕의 賜牌, 지방수령이 주는 立案, 墳山의 禁養이다. 이 중에서 立案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입안은 특히 지방 양반들의 경우 이를 통해 산림천택을 사점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입안의 대상으로 ‘거친 산, 첩첩 봉우리, 먼 갯벌, 작은 섬’을 들었다. 사패지의 경우 ‘구릉을 포함하고 벌판까지 뻗쳐 모두 내 땅이라’ 한다고 하였다. 김선경, 「17~18세기 양반층의 산림천택 사점과 운영」, 『역사연구』 제 7호, 2002
개간을 위해서 미리 허가를 받고 임시적으로 개간권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입안에 한 번 오르고 나서는 이를 양반들이 사점했던 것이다.
『明宗實錄』의 다음의 기록을 보면 국가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山林과 川澤의 이익을 백성과 함께 한다’고 하고 있는 부분이 그러하다.
E. 헌부가 아뢰기를, 왕자는 백성에 대하여 厚生하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山林과 川澤의 이익을 백성과 함께 하니, 그 은혜로움이 넓다 하겠습니다. 조종조에서는 여러 곳의 漁箭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이익을 얻게 하였으며, 사사로이 柴場을 점유하는 것도 모두 금지하였었으니, 후생 하는 방법을 얻었다 하겠습니다. 憲府啓曰 王者之於民, 凡所以厚生之道, 無所不用其極, 故山林、川澤, 與民共之, 其爲惠博矣。 祖宗朝諸處漁箭, 給民蒙利, 至於私占柴場, 亦皆有禁。 可謂厚生之得其道矣。『明宗實錄』15卷, 8年 8月 11日(乙酉) 2번째 기사



그러나 이러한 사점의 폐단으로 이를 죄로 다스릴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今者公主、王子諸家, 或稱田結之價, 或稱陳地之價, 或稱納穀之價, 竝海漁箭, 盡爲立案、至於茫茫滄海, 亦皆私占, 若有漁船, 來自海中, 則托以捉魚於吾立案之地, 坐待到泊, 多率徒衆, 恐嚇奪取。 自五六年以來, 漁商不行, 魚鹽極貴, 城中之人, 食不得魚。 至於各官漁箭, 亦爲所奪, 故官中所用魚物, 分徵於民戶, 民亦不能支, 流離相繼, 生民之害, 不可勝言。 請各處漁箭及海水立案者, 竝令該曹還收, 以業貧民, 其田結及陳地之價, 亦令商磪處置, 仍爲作弊者, 其奴子, 全家徙邊, 其小小川渠及巖石等處, 受立案者, 亦依私占柴場律治罪。『明宗實錄』15卷, 8年 8月 11日(乙酉) 2번째 기사
이러한 상황들이 조선 후기에 오면서 국가 재정과 관련한 문제가 되었다. 김선경, 위의 논문에서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밝히고 있다.


맺음말
위에서 살펴 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柴地에 대한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고려와 조선의 시대적 배경 등을 자세히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서로 다른 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시대의 柴地는 땔감을 목적으로 분급되었고 한편으로는 개간을 목적으로 했다. 柴地의 생산물들이 수조의 문제가 없었으므로 고려시대에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조선 초의 柴地는 寺社에 분급되었으나 그 목적과 쓰임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조선후기의 산림천택은 양반들이 사점하여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산림천택의 사점의 목적과 추이 등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柴地가 얼마나 다른 상태였고 얼마나 개간되었는지에 대해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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