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_아름다운 영웅 김영옥_저자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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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독후감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저자 한우성
그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
이 책의 저자는 한우성으로, 그는 연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미주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기자라는 직업의 사명에 걸맞게 여러 방면에서 사회적·역사적 문제를 짚어내고자 하였는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역시 그 맥락에 걸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1997년 김영옥 대령을 처음 만났고 이후 약 7년 동안 김영옥의 이야기를 취재하여 이 저서를 펼쳐내었다.
김영옥 대령에 관해 간단히 서술하자면 그는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3개국에서 최고 무공 훈장을 받은 전설적인 전쟁 영웅이자 평생을 여성과 아동, 빈민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바쳤던 인도주의자였다. 지난 2005년 세상을 떠났으나 여전히 한국전쟁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했던 전쟁 영웅으로, 그리고 미국에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인권을 대변하는 지도자로서 기억되고 있다. 그는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고 실로 아름다운 영웅이었다.
기실 책을 읽지 않은 지 좀 된 나에게는 결코 짧은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그의 생애에 빠져들수록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고, 그의 삶에 비추어 나의 삶을 얕게나마 뒤돌아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과 떠오른 생각들은 한마디로 일축하기에는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낚아 하나의 줄기로 엮기 위하여, 이 글에서는 김영옥의 생애를 바탕으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에 관한 견해들을 전개해 보고자 한다. 특히 그를 ‘아름다운 영웅’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여러 가지 특질들을 심도 있게 생각해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김영옥 대령의 일생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이민을 간 한인 교포 2세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로스엔젤레스 시티 대학에 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 육군 모병소에 지원했지만,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지원을 거절당했다. 1년이 지난 후에야 법이 개정되면서 아시아계도 징집 대상에 들어갔고 이때 육군으로 입대하였다.
그가 직접 육군 모병소에 지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거절당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서 느낀 것은 그는 정말 ‘영웅’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옳음과 그름을 구분할 줄 알았고 동시에 옳음을 택하는 용기와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제 발로 모병소에 갔던 이유는 그의 올곧은 성정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일 터였다.
동시에, 그가 지원을 거절당한 이유는 오직 그가 아시안계 교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에 나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자아이들의 놀이에 끼지 못하고는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과 나 모두 참 어렸고 그렇게까지 속상해할 일도 아니었지만, 나의 성정이나 노력 여하가 아닌 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난 요소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이 그때의 나에게는 퍽 서러웠었다. 본디 차별이란 그런 것이지 않은가. 생각보다 무의미하고 불공평하지만, 처음부터 어떠한 가능성을 배제한 채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차별이다.
그가 처음부터 육군으로 참전할 수 없었던 것 역시 그의 혼혈로 인한 부당한 차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약점과 상처가 있기에 그로부터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약점과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듯이 그가 차별받았던 기억은 훗날 그가 인권을 위해 애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누군가의 약한 부분을 위해 행동했던 그의 자취야말로 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입대 후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선발되고 장교까지 올라갔다. 이때 인사 실무자의 착오로 인해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2세대로 이루어진 부대, 육군 100보병대대에 배치되어 소대장을 맡았다. 이 대대는 반쯤은 인질에 가까운 개념으로 창설된 것으로, 교포 2세대를 뜻하는 ‘니세이 부대’로도 불렸다. 당시 일본은 적대국이었는데, 일본 교포들이 일본에 협조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징집 연령대의 남성 중 지원자들을 묶어놓은 부대가 바로 100보병대대였다. 이 부대가 창설되면서 일본계 미국인들은 백인으로부터 냉대와 조롱, 차별, 린치 등을 당하며 고통 어린 생활을 해야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착오 때문에 이 부대에 들어가야 했던 김영옥에게는 가히 불편할 만한 부대가 아닐 수 없었다. 대대장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일본인과 한국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고려해 김영옥에게 전출을 제의했지만, 그는 ‘우리는 모두 미국인으로서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운다’며 거절하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편의나 안락함보다는 그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따른 것이다. 그와 관련된 기사를 더 찾아보니, 그의 솔선수범하는 태도와 패기에 감복한 병사들은 김영옥의 별세 전 행사에서 그를 극진히 예우했다고 한다.
그의 태도가 가히 아름다웠던 이유는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며 대립 구도를 만드는 대신 하나의 목적 아래에서 사람들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협력과 협업, 입으로 떠들기 쉬운 말이지만 몸소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에 동창들 열 명이 모여도 다들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갈라서기 마련인데, 하물며 가장 큰 불편을 겪고 있었을 그가 다른 이들과 협동하려 한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닐 터였다.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나는 군인으로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지금 진실로 다른 이들과 협동하고 있는가? 군대는 하나의 조직이고, 한 조직이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의 합, 그 이상의 시너지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바람직한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동기를 부여할 올바른 목적이 필요하다.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문득 떠오른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옳은 것을 택하는 일이다. 현재 나는 군인으로서, 대한민국의 장성한 남자로서 힘을 기르고 있다. 단순히 오늘의 일과를 어서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훈련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겠다는 생각으로 훈련에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써 약자를 보호하고 국력에 내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다면 군인으로서 이보다 보람찰 수는 없을 것이다.
김영옥은 이후 미 육군 제5 야전군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뛰어들었다. 다른 100대대 장병들 역시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자 했다고 한다. 100대대 부대의 모토는 “go for broke”였고, 퍼플 하트 대대라고 불릴 만큼 격렬하게 전투에 임했다. 상부에서도 100대대의 싸움을 보고 이와 비슷한 일본인계 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는 결국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의 결과였다. 이 때문인지 일본인 2세 교포들은 일본을 향한 적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인식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60년대에 미국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야 조금씩 이 부대의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김영옥은 이후 전방에서 상당한 공을 세우고 능숙한 독도술과 기상천외한 전술을 발휘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프랑스 비퐁텐느에서 김영옥 소대장이 수류탄을 들고 독일 육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하다가 총에 피격당하자, 이에 울컥한 소대원 전부가 기관총 진지에 반자이 어택을 행하면서 방어하던 독일군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김영옥 역시 다행히 경미한 상처를 입었기에 쓰러진 자리에서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지며 부대원을 엄호하였다. 이는 유럽 전선에서 유일하게 실행된 반자이 어택으로 현재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병 한 명과 함께 해가 뜨는 아침에 갈대밭을 기어가서 참호에 들어간 후에 독일 육군의 진지 안으로 잠입하기도 했다. 이때에는 독일 육군 지휘소에서 근무하던 병사 두 명을 생포해 왔다. 이후 도하 작전을 일부러 두 번 실패하여 상대를 방심하게 한 후 세 번째에 작전에 성공함으로써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피사를 점령하기도 했다. 실로 전략과 실행력을 고루 갖춘 군인의 귀감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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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옥과 결혼.1931년 조선일보에 『삼대』 연재함.1945년 안동에서 광복을 맞은 후 신의주로 올라감.1946년 서울로 돌아와 경향신문 창간 편집국장 지냄.1948년 「만세전」을 개작하여 출간함.1950년 해군 입대. 이듬해 해군 소령 임관.1952년 조선일보에 「취우」 연재.1956년 「짖이 않는 개」로 자유문학상 수상.1957년 예술원 공로상 수상.196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서훈. 12월 사상계에 마지막 글 「횡보문단회상기」 발표.3월 14일 직장암으로 사망.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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