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賈誼)에서 중장통(仲長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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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9장 가의(賈誼)에서 중장통(仲長統)까지
1. 개설 3. 동중서(董仲舒)
2. 가의(賈誼) 4. 종합 정리(토론)
1. 개설
1)유학의 부흥
옛 학설에 의하면 옛 학술은 진(秦)에서 훼손되어 사라졌다가 한()대에 부활했다고 한다. 실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법치를 참되게 행하지 않았고, 또 유술을 막아 버리지도 않았다. 진시황이 선비들을 묻어 죽인 것은 함양(咸)의 선비들 가운데 금법을 범한 자 4백여 명을 죽인 것이지, 선비들을 모조리 죽이고 폐금(禁)했던 것은 아니다. 서적을 태운 것도 사학(私學)이 교화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유술을 소멸코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진시황의 정치는 법가와 유가를 겸용했던 것이다. 그것은 앞선 진효공의 옛 법제와는 배치되고, 뒷말에 나타나는 한무제의 통치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한무제와)다른 것이 있다면 진시황이 임법(任法)을 위주로 하여, 유술을 여러 사상 가운데 하나로 배열했다면, 무제는 공자를 종사로 존숭하고 관자 상자의 치술로써 정치를 보완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사인(私人)이 학문을 논하는 것을 금했고, 항우가 다시 함양의 관서(官書)를 태웠(206 BC)음에 따라 선진의 학술은 확실히 쇠퇴하는 형세에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아직 백가의 편단이 남아 있었고 후학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혜제 4년(漢惠帝4年, 191 BC)에는 협서율(挾書律) 진시황이 서적의 사적인 소유를 금지한 법률임.
을 풀었는데 진대의 소극적인 통제정책을 버리고 유학을 적극적으로 제창하게 되었다. 유학의 세력은 한초의 50여 년 동안에 이미 뚜렷하게 진전하기 시작하였고, 한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승상 위관(衛)의 주장에 따라 현량 가운데서 신불해/상앙/한비/소진/장의 등의 사상을 공부한 사람을 파직했다. 5경이 관학으로 세워지고 민간에도 강습이 허용되었다.
2). 한대 유학의 궤적(漢代儒學之軌跡)
한대의 유학은 대체로 선진의 것을 답습했다. 그러나 변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두 시대 4백여 년 동안 유가의 정치사상은 내용의 변천에 따라 아래의 3기로 나누어진다. ① 제1기는 대체로 고조(高祖)/혜제(惠帝)/문제(文帝)/경제(景帝)의 4조에 해당한다. 그 60년 동안에는 황노(黃老)사상이 번성했다. 유가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무위를 겸하여 숭상했다. 가의(賈誼)가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이다.
② 제2기는 무제로부터 왕망(王莽)에 이르기까지의 약 160년이다. 그 시기에 유가는 황노의 굴레를 벗어나 세상에서 독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용은 이미 선진의 순수한 유가가 아니었고, 맹자순자와는 크게 달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음양오행의 언설과 서로 섞이다가, 끝에는 부명(符命), 참위(讖緯)의 미신으로 나아갔다. 동중서(董仲舒)는 이 시기에 명성이 가장 컸던 대가였다. 서한의 많은 금문경사(今文經師)들이 천인(天人)관계와 재이(災異)를 말했는데 동중서 외에도 비교적 두드러지고 정치사상이 논할 만 한 자가 많았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에는 휴홍(弘), 『춘추곡량전(春秋谷梁)』에는 유향(劉向), 『서경(書)』에는 이심(李尋), 『역경(易經)』에는 곡영(谷永), 『시경(詩經)』에는 익봉(翼奉)이 있었다. 동중서의 학문과는 약간 종지를 달리했으나, 그들은 모두 당시의 군주를 바로잡는 데 뜻을 두었다. 그러나 원제(元帝)와 성제(成帝)의 조정[48-7 BC]에서는 천인과 혁명의 사상이 극성을 지나 쇠퇴하기 시작했다. 애제(哀帝)와 평제(平帝)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사상은 재이와 혁명을 벗어나 부패 퇴화하면서 참위와 부명으로 바뀌었다. 왕망이 찬탈의 마음을 가진 것도 그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왕망은 부명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물론 일족이 멸망하고 말았으나 그는 죽을 때까지 그것이 미신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왕망의 ‘신(新)’ 왕조가 전복된 뒤에도 조야의 인사들이 그런 비루하고 조잡한 미신을 버리지 못했다. 광무제가 즉위하기 전의 혼란기에 군웅들은 지력을 다투었고 문인들은 부명을 변설했다. 당시의 토론은 부명이 믿을 만한지의 여부가 아니라 누가 부명을 응수하여 천하를 취득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대체로 그것은 이성(異姓)이 새로 왕이 된다는 설과 유씨(劉氏)가 다시 일어난다는 두 가지였다. 광무제는 이통(李通)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도참을 통해 거사했다. 건무(建武)와 중원(中元) 광무제 시기 썼던 연호임.
의 시기 동안에는 부참이 황제가 보호하는 일종의 국교가 되었다. 중원 원년에(56년)는 도참을 천하에 선포했다. 그것은 왕망이 부명을 반포했던 것과 비슷했다. 오히려 더욱 심해서 사람을 쓰는 것조차 참기(讖記)에 의거하여 결정했고, 신하가 참기를 비판한다고 해서 진노하기까지 했다. 신도(神道)가 교화로 세워져 무풍(巫風)이 크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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