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4 19」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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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4월의 하늘을 뒤흔든 학생과 시민의 함성 소리
「새로운 4.19」를 읽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4.19혁명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얼마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기억 속에서 4.19혁명은 잊혀가고 있다.
이 책을 빌린 이유도 처음엔 한국사 수행평가 때문이었지만, 잊혀 가는 4.19혁명을 다시 기억해보고 싶어서였다.
6.25 전쟁이 지난 2년 후,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가시지 않은 1952년이었다. 혼란에 빠진 한반도에서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개헌하였다. 이 후 1954년에 사사오입개헌 이라는 개언을 단행하게 되는데 사사오입개헌을 가결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이승만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1956년 5.15 부통령 선거 때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신익희가 급사하자 전세를 뒤집을 것 같았던 자유당은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20%가 나오고 부통령에 민주당인 장면(사람 이름) 이 당선됨을 보고 권력유지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장면이 부통령으로 당선된 후, 자유당의 만행이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도미를 하자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긴 3.15 부정선거를 실시하게 되는데 이 선거에서 이승만, 이기붕 표가 80%의 득표율이 나올 정도의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 때 국민을 상대로 한 정부의 배신에 분노를 느낀 학생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1960년, 결국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시위가 대구에서 일어났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일 이었던 일요일에 대구시에 있던 모든 초중고생이 당국의 지시에 따라 등교를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야당의 민주당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이 때 여당이 내린 조치의 대상이 성인이 아닌 학생이었던 이유는 일제시대의 3.1운동부터 당시 1960년까지의 시위의 주최자가 학생이었던 만큼 학생들이 정치적인 영향이 큼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여당이 내린 조치로 인해 대구에서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시위가 일어나자 이어 3.15선거 직전까지 서울, 대전, 수원, 부산까지 잇따라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던 분노는 점점 자유당의 부정 정치에 대한 반발로 변하여 학생들이 점점 정치 조직화되어 졌다. 시위대가 조직화 되어감에 따라 자유당 정치 폭력배들의 대처가 무자비해지자 학생들이 많이 죽고 행방불명되는 등 시위대를 더욱 흥분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생들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대학생, 교수로 까지 확대되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죽은 김주열군의 사건이었다. 3.15 시위 중 행방불명된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닷물에 떠있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일을 안 고려대학교 재학생 3천명이 4월 18일 총궐기 대회를 가졌으며 다음날인 4월 19일,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이 총궐기 선언문을 낭독하며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는 더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들이 나섰지만 이들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여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돼버렸다. 무차별 사격으로 분노가 커진 시위대는 경찰차를 탈취, 폭파하며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서대문 경무대 로 알려진 이기붕의 집까지 습격하였으나 정치폭력배들에게 또 다시 진압당하며 사상자를 냈다. 마치 전쟁과 같던 서울을 보고 정부는 당황한 나머지 계엄령을 선포하여 100명에 이르는 사상자와 450명에 이르는 부상자를 내었다. 이에 정부가 합동위령제를 올리며 병 주고 약주는 식으로 나오자 학생시위대는 거센 반발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겠다고 했으나 정작 대통령직을 포기 한다거나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한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시위대는 크게 반발하였고 4월 25일 서울 각 대학의 259명의 교수들이 시위에 나서는 동시에 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과 시민대표 5명이 이승만과의 면담을 하여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했고 이기붕 역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4.19혁명의 막을 내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4.19혁명을 기억할 수 있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 협력하여 싸우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피땀을 흘리고 또 목숨까지 바친 분들이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보여 안타깝다.
이제는 4.19혁명처럼 우리 모두를 생각하고 협력하며 지냈으면 좋겠다.
만약 4.19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 개발독재가 없었고 정국의 혼란과 남북의 대치 속에 이 나라의 근대화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후진국의 틀을 벗지 못하고 빈곤의 나라에서 허덕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과거에서 희생한 사람들이 있기에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 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잊는 자는 미래를 잃을 수 있다. 4·19혁명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가치 있는 것처럼 오늘의 젊은이들이 4·19 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의 찬란한 미래를 열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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