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마르크스주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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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초기 마르크스주의 철학
1. 이대조의 생애와 사상
이대조는 봉건적인 구예교와 구도덕에 대한 투쟁에 앞장선 용감한 전사였다. 자는 수상이고, 하북 낙정사람이다. 일찍이 청년학도 시절부터 애국의식이 투철하였다. 1913년 북양 법정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경 와세다대학에 들어갔다. 유학기간동안 학업에 열중하며 일본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소개한 「사회주의」사조의 저작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일본 유학생활중에 일찍이 「경기학회」. 병진학사를 비밀조직하여 「반원활동」을 하였다. 그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1916년 상반기에 귀국했다. 귀국 후 《신종보》의 편집장을 맡아 “쇠같이 단단한 어께에 도의를 짊어지고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문장을 저술한다”는 말처럼 이제 막 한창이던 신문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했다.
1918년까지의 그의 사상은 《언치》시대,일본 유학시대, 귀국 후의 셋으로 나뉘어진다. 아래에서 그 순을 따라 사상의 발전과 그에 일관하고 있는 것을 고찰해 가기로 한다. 이대조의 문필활동이 시작된 것은 1913년 북양법정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몸소 졸업생을 조직해 ‘북양법정학회’를 창설, 그 기관지 《언치》의 편집장이 된 때부터이다. 그가 출발한 시점이 신해혁명 직후였음은 그의 사상에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지금까지 극히 한정된 기회밖에 부여받지 못했던 사람들 앞에, 넓은 지평선이 펼쳐지고 있다는 의식이야 말로 실로 일 국민의 정신 속에 가장 바람직한 것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러시아 혁명에 대한 라스키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듯한 정신상황 위에 중국 인텔리겐챠들은 놓여 있었다.
신해혁명은 비록 완전한 실패로 끝났지만 사람들의 의식에 한 차례 넓은 지평선의 전망을 넓혀 주었다고 하는 사실은 중국 근대사상상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군벌에 의한 혁명 성과의 횡령은 이 전망을 갑자기 어둠속에 가두기는 했지만 그것이 절망이라고 하는 형태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지탱되고 있는 한, 언젠가 그 전화-개방이라고 하는 형태로 다른 양상을 드러내면서 재현할 것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침체기에 있어서의 사상의 양성을 파헤치는 것은 도래할 앙양의시대에폴발할 에네르기를 고찰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민국 초년은 확실히 빛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노신은 적었다. 이대조 또한 “우리가 불행하여 전제의 액운에 침울해한다. 그 때 민군 민권하는 소리가 짓눌린 암흑의 공기 중에 떠돈다. 입으로 이렇게 말하고 귀로 이렇게 들으니 통쾌한 느낌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하고 희망을 불태운 것이었다. 당시의 정론은 예를 들면 《언치》와 《독립주보》에 보이는 것처럼, 대체로 현실의 추악함을 단순한 기술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본질적으로는 선한 것인데 그 주관적 목적을 위해서 타락했을 뿐이며, 선량한 본질(혁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와 같은 주관적 왜곡(당략, 사리 추구)을 배제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현실의 암흑을 혁명의 타협, 횡령에 의한 필연적인 것으로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 당략과 사리로 사용했다고 하는 관념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혁명의 ‘빛’에의 환상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본적 비판을 회피하는 사고 방식이 통용되기에는 현실의 진전이 너무도 빨랐다. 13년은 원세개의 정식 대총통 취임에 의한 전제 강화가 역연히 나타나는 시기이다. 사람들은 이의 없이 ‘혁명’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대조의 사상도 사회에 대한 본질적 비판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혁명의 이상이 무산되었을 때, 그들 사상가들은 청말과는 다른 견해로 ‘주체’의 무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아직 혁명을 경험하지 않은 때의 청말 사상가들은 청말과는 다른 견해로‘주체’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아직 혁명을 경험하지 않은 때의 청말 사상가들의 탐구는 어찌되었든 희망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에 반해 일단 혁명과 그 좌절을 겪은 자들은 절망 가운데서 출발했다. 손문으로 하여금 ‘알기는 어렵고 행하기는 쉽다’라는 학설을 구하게 한 상황이 여기에는 있었다. 전대의 사상가들과 후에 문화혁명을 지도한 자들과의 단층은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의 절망으로 인한 당인, 도독에 대한 공격은 거의 모든 논문에 일관하고 있다.
더구나 그 공격에 성급한 나머지 원세개의 중앙정부를 옹호하는 듯한 논조까지 보이고 있다. 그가 공화를 구하면서도 원정부 옹호로 기울었다고 하는 모순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를 위해서는 그의 ‘공화’에 대한 관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우 기묘한 일이지만, 그는 관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우 기묘한 일이지만, 그는 ‘공화’‘민권’에 대해 거의 명확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다른 사상가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서구의 거울을 갖고서 중국의 현실을 비춘다고 하는 방법은 그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 서구적 합리주의와 무관한 성격은 거의 평생토록 변함이 없다. 그러면, 그의 비판은 무엇을 답습하고 있던 것일까. 분명히 말할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확고한 신념으로서 ‘공화=소민의 행복’이라고 하는 도식이 지배하고 있었던 점이다. 공화는 이미 이루어졌는데 어찌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진 것인가. 혁명은 이상의 세계를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도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격하게 정부와 대립하는 민당과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하여 군정재정을 제멋대로 하는 도독 때문이다.
이 논리에 일관하는 것은 ‘공화’보다도 ‘민생’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고이다. 공화는 민생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나아가, 기성적인 것에 대한 절망은 후의 「청춘」,「오늘」에 나타나는 동적 우주관의 원형을 지니고 잇는 것임에도 지적해 둔다. 도독을 일단은 혁명의 동력이라 인정하면서도, 혁명 후 여전히 실권을 잡게 되는 것에는 반대하여, 현실의 변화에 따라 그 권력을 버리라고 할 때「도독의 독단적의론을 재단한다」,그것이, 과거를 파기하고 늘 새로워지라고 하는 그의 철학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임을 알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그에게는 계급관 내지 계급적 입장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그는 ‘소민’의 입장을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계급관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회를 신분구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구성으로서 파악하는 것이지, 그가 ‘소민’‘금수’라고 말하면서 권력자와 대치시키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은 아니다. 그 자신도 이원제에 반대하여, ‘중국에는 구미와 같은 계급은 없다’고 하며 계급관을 피하고 있다. 「일원제와 이원제」. 이 계급관의 결여가 뒤에서 서술할 ‘조화론’의 기초가 되어, 그것을 관념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중국근대의 혁명사상, 마루야마 마츠유끼, 1989, p157
이상이 《언치》의 논문에 나타난 이대조 사상의 개략이다. 이리하여 그는 여러 가지 문제를 품고 1913년 겨울,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시대에 사회와 개인, 사회와 정신에 관한 사색을 이대조는 그의 첫 번의 철학적 논문 「풍속」에서 전개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군’의 개념을 제기한다. 그의 ‘군’은 사회 내지는 민족을 의미한다. ‘군’이라고 하는 개념은 아마도 양계초「설군10편」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양은 군을 민중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여, 군치를 독치와 대치시키면서 입헌군민제로의 개혁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군은 ‘억조경이나되는 사람들이 집합하여 군을 이룬다’고 하듯이, 철학적 개념으로까지 고양되어 있지는 않다. 이대조의 경우, ‘사회존재’의 의미로까지 추상화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할 것이다.《언치》의 시대에서, 우리는 그가 한 차례 국민 기반의 문제를 토로한 것을 보았다. 지금은 그 문제의식이 》‘군’이라는 개념하에 포괄적인 사색이 되어 재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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