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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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년 5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모택동에 의해서 발동되고 영도된 정치운동. 모택동은 한 무리의 자산계급과 반혁명의 수정주의 분자들이 이미 중국공산당, 정부, 군대와 문화영역의 각계 안에 섞여 들어와서 상당히 많은 단위의 영도권이 이미 마르크스주의자와 인민군중의 손에 있지 않다고 여겼고 당내 자본주의노선을 걷고 있는 당권파(當權派)가 중앙에 자산계급 사령부를 형성하고 그것이 하나의 수정주의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가지고 있고 각 순,시,자치구(省, 市, 自治區)와 중앙 각 부문에 모두 대리인이 있고, 과거 각종 투쟁은 모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기고 단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실행해서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광대한 군중을 발동해 나와서 앞에서 기술한 어두운 면을 들추어내야만 도자파(走資派)에게 탈취 당한 권력을 다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실질상 한 계급이 한 계급을 전복시키는 정치대혁명이다. 이런 착오의 예측에 근거해서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의 발동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발단은 오(吳)함의 경극 "해단태관(海瑞罷官)"에서 비롯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1966년 5월 문화대혁명 발동에서 1969년 4월 중공구대태계(中共九大召開)까지이다.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통과한 오일육 통화<五·一六 通知>와 동년同年 8월 중공8차11 중전회中全會에서 통관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전면발동의 표지이다. 이 두 차례의 회의는 소위 彭眞, 나단즉羅瑞卿, 연정일陸定一, 양상개楊尙昆 반당反黨집단과 소위 劉少奇, 鄧小平 司令部에 대해서 착오의 투쟁을 진행하였다. 중공중앙영도기구에 대해서 착오의 개조를 진행했고 성립된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중앙의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모택동의 개인 영도는 실제상으로 중공중앙의 집단영도를 빼앗아 대신 들어섰다. 모택동의 개인숭배에 대해서는 열렬한 정도로 치켜세웠다. 林彪, 江靑 등은 "중앙혁명소조"의 명의를 이용해서 기회를 타서 "打倒一切", "全面 奪權"과 전면내전을 선동했다. 중앙 여러 부문과 각지방의 당·정의 영도기구는 거의 모두 奪權과 개조를 당했다. 中共九大는 "문화대혁명"의 착오이론과 실천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임표, 강청, 康生등의 중앙에서의 지위를 강화했다.
두 번째 中共九大부터 1973년 8월 중공 제10차 전국대표대회까지이다. 1970년에서 1971년사이에 임표 반혁명집단이 최고 영도권을 탈취하려는 음모와 반혁명 무장정변을 책동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모택동, 周恩來는 임표 반혁명집단의 정변을 분쇄하였다. 모택동의 지지하에 주은래는 中共中央工作을 주재하였고 각방면공작에 轉機를 있게 하였다. 1972년 주은래는 극좌사조를 비판하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당시의 임무가 마땅히 "極右"를 반대하는 것으로 여겼고 주은래의 정확한 의견은 관철되지 못했다. 中共十大는 九大의 착오 노선을 계속했고 王洪文을 중공중앙 부주석에 임명했다. 강청, 張春橋, 姚文元, 왕홍문은 "四人幇"을 결성했고 강청 반혁명 집단의 세력은 강화되었다.
세 번째 中共十大에서 1976년 10월까지. 1974년 초 강청일당은 "批林批孔"을 빌어서 창끝을 주은래에게 향하였다. 모택동은 강청등이 기회를 빌어 纂權활동을 진행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 심한 비판을 하였다. 1975년 주은래의 병이 중하자 등소평이 중공중앙공작을 주재하고 각 戰線에 대해서 정돈을 진행했고 형세가 분명히 호전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의 착오을 교정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批鄧, 反擊右傾飜案風"운동을 발동했다.
전국은 재차 혼란에 빠져들었고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하자 "四人幇"은 奪權을 음모하였다. 4월 전국에서는 天安門사건으로 대표되는 주은래 추도와 사인방 반대의 혁명운동이 발생하였다. 중공중앙과 모택동은 천안문사건에 대해서 판단착오를 하여 착오스럽게도 등소평의 당내외 모든 직무를 박탈했다.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하자 강청반혁명집단은 纂黨奪權의 음모활동을 가일층 진행하였다. 10월 상순 중공중앙은 사인방에 대해 격리 심사를 결정하였고 강청반혁명집단을 분쇄하였다. "문화대혁명"도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文化大革命"운동은 한바탕의 영도자 착오로 말미암은 착오운동으로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에 의해서 이용되었고 당·국가와 인민들에게 커다란 재난의 내란을 가져다주었고 당·국가와 인민에게 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주었다. 문혁으로 인해서 중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信心의 위기 정치적으로는 人治·파벌주의로 정치제도적 불안정을 가져다주었고 경제적으로는 장기간 경제 침체와 국제적 낙후성에 대한 불안이 나타나게 되었다.
문학대학명의 원인과 사건의 전개 과정 그리고 의미를 나누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문학대혁명은 기간은 협의에 경우는 1965년 11월 문예 비평가 요문원이 문회보에 新編歷史劇 海瑞罷官을 評한다라는 비평 게재 부터 1971년 임표의 군사쿠테타 반란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광의에 경우는 1976년 9월9일 모택동 사망까지를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해서파관은 북경 부시장 오함이 1961년 1월 북경에서 공연되었던 연극이었는데 그 내용은 명조 嘉靖(세종)제때 고관이었던 해서는 정치에 태만하므로 충성어린 간언을 하였으나 파직 당했습니다. 그러나 해서는 관직에서 추방되었어도 혼자서 명조를 옹호한다.라는 옛날 사극같은 내용이었는데 처음엔 정치 이슈화 되지 않았으나 집요한 4인방에 위해서 정치 문제화 됐습니다.
대약진 운동이 끝나고 모택동이 제2선으로 물러 났습니다. 두문불출하여 유소기,등소평등 개혁 세력들의 작태(?)를 본 모택동은 다시 한 번 권력을 잡기로 맘 먹었습니다. 그래서 4인방(강청,요문원,왕홍교,장춘교)을 시켜서 개혁파의 약점을 잡는데 주력을 했습니다. 탐문 끝에 해서파관이 눈에 띄웠고 개혁파의 연결고리를 거기에서 찾아 냈습니다. 앞에서 상기한 것 같이 그 내용중에 은근히 모택동을 비판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물론 그것은 4인방의 인위적인 판단이다.)
대약진 운동이 끝난 시점에 노산회의가 개최 됐습니다. 그때 팽덕회는 모택동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고 모택동의 눈에 거슬린 팽덕회는 그후로 정치적 숙청을 당했습니다. 모택동=가정제, 팽덕회=해서로 대치 시켜 놓고 해서가 간언을 가정제가 안 들었듯이 팽덕회의 의견을 모택동이 안 받아 줬다. 식으로 견강부회식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함이 자주 글을 기고한 중국 3대신문(해방군보,인민일보,북경일보) 역적몰이 식으로 비판했고 그 불통이 개혁파로 튀었습니다. 이에 유소기,팽진등이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서 2월 요강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오함에 대한 비판은 학술적인 문제이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이에 반발한 모택동과 추종자들은 2월 요강을 비판하고 문학논쟁을 군중비판으로 발전했습니다.
1966년 5월중순에 당중앙위원 정치국확대회의가 개최 됐고 이 회의에서 五一通知가 결의 됐습니다.(내용은 2월요강폐지,문화대혁명5인소조 해체등등) 당권을 장악한 모택동은 북경대을 중심으로 문화 대혁명을 확산 시켰고 그 와중에 홍위병을 조직하여 중국전체를 죽음의 늪으로 빠뜨렸습니다. 사회는 극도의 혼란, 불안,무질서의 상태속으로 전락되었으며 경제는 거의 파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모택동은 군의 개입을 요청했고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홍위병의 난동을 진압했습니다. 그리고 산업과 군대의 모든 기구를 통제 감시하기 위해 군사통제위원회를 설치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임표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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