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 철학과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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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묵가 철학과 민중
一. 묵자(墨子)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묵가를 창시한 묵자(墨子)는 성이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이다. 노(魯)나라 사람인 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지 않아 자세한 것을 알기는 어렵다. 전목(錢穆)에 의하면 B.C. 475년에 태어나서 B.C. 392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요 활동 연대는 전국초기(戰國初期)이다. 그는 일찍이 유학을 공부했으나 유가의 번잡한 예(禮)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학설을 창설했다. 묵자가 살아 있을 때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를 요동치던 불안한 시대였다. 따라서 묵자는 분쟁을 제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자기의 주요임무로 삼았다. 그는 바쁘게 유세하고 자기의 이상을 선전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자(文子)는 “묵자의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유가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묵자도 요ㆍ순ㆍ우ㆍ탕ㆍ문ㆍ무 등의 성왕을 숭상했으며 특히 하(夏)나라의 우(禹)왕을 존숭했다. 그는 우(禹)임금의 실천정신과 희생정신을 따르려 노력했다. 맹자는 묵자를 금수와 같은 존재라고 욕하면서도 “머리끝에서 발뒤꿈치까지 온몸이 다 닳도록 천하를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맹자(孟子)』, 고자하(告子下)편.
고 칭찬하는 걸 보더라도 묵자의 천하를 위한 희생정신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박문현, “묵가의 겸애와 비공평화론”, [통일전략], 제7권3호, (한국통일전략학회, 2007), p.259.
또한, 묵자는 사상가이면서도 논리학자이고 군사전문가이었다. ‘묵변(墨辯)’이 쓰여진 것은 후기묵가에 의해서지만 이 중에 들어 있는 명변(名辯)의 기본사상은 묵자에게서 온 것이다. ‘성수(城守)’ 제편에서는 묵자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불의의 겸병전쟁은 반대하지만 약자들의 자기방어를 위한 전투는 지지한다. 그러므로 묵자의 책에는 전략적 방어사상에 입각한 방어의 전술과 방법이 강조되어 있다. 그가 제출한 방어에 필요한 14개 조건에는 천시(天時)ㆍ지리(地利)ㆍ인화(人和)ㆍ정치ㆍ경제ㆍ외교 등 각개 방면이 포함되어 있다. 묵자는 군사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이 방면의 인식이 부족하여 그의 군사사상의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묵자는 또 뛰어난 과학기술자로 군사무기를 발명하기도 하고 기하학·광학·역학(力學) 등에 관한 창의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중국과학사의 권위자인 영국의 조지프니담이 묵자서를 읽고서 감동하여 중국과학사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묵자는 묵가학파를 창설한 개조(開祖)이다. 묵자의 제자는 3백 명이라고 ‘공수(公輸)’편에서 말하고 있으나 이것이 전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 중에는 각국에 나가 관리가 되거나 유세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여불위(呂不韋)가 “공자와 묵자의 제자들이 천하에 꽉 차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존사(尊師)편.
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학술적인 영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비자(韓非子)는 “지금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
다” 『한비자(韓非子)』,현학(顯學)편.
라고 말한 것이다. 박문현, “묵가의 겸애와 비공평화론”, [통일전략], 제7권3호, (한국통일전략학회, 2007), p.260.
묵가와 유가를 비교해 보면 그 조직제도나 구성원들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유가가 엄격한 조직관리제도를 갖지 않고 제자들도 대부분 예악, 문교에 종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묵가의 조직제도는 비교적 엄격하고 대단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조직에는 거자(鉅子)라는 리더를 두었는데 묵자(墨者)들은 그를 성인처럼 받들면서 그의 지휘에 따라 일체의 행동을 감행했다. 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보통 무사들
과 달리 억강부약(抑强扶弱)의 필요가 있을 때 고도의 전투력을 갖춘 의용군이 되어 약소국을 도와 싸웠던 것이다. 묵자의 인격에 끌리어 그의 제자가 되고 그들에 의해 조직된 묵문집단(墨門集團)은 묵자 스스로가 밝혔듯이 300인 내외로 보이는 방대한 단체로서, 그 성격은 묵자 에 뚜렷이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종교성을 띤 국제적 평화유지단체로 생각된다. 강학(講學)을 중시하면서도 기율이 엄격하고 희생정신이 강한 중국학술사에 있어서 특이한 집단이다.
거자(鉅子)는 묵자 이후 맹승(孟勝)→전양자(田襄子)→복돈(腹黃亨) 으로 이어졌다. 묵자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격변의 시대였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체제의 붕괴로부터 시작된다. 춘추시대에 이미 시작된 봉건제의 붕괴는 전국시대에 와서는 수습이 불가하였다. 이 시대에 두드러진 두 가지 현상은 계급의 파괴와 제후들의 겸병전쟁이었다. 주(周)의 평왕(平王)이 동천한 이후 권력은 더욱 약해져 제후들은 예제를 지키지 않고 스스로 왕(王)으로 칭하곤 했다.
제후들은 천자를 참월하고 경대부들은 제후를 참월하였으며 심지어 가신들조차 경대부를 참월하였다. 이렇게 계급조직 하나하나가 파괴되어 가는 국면을 본 귀족출신의 공자는 주(周)의 문화를 바로 잡으려 애썼으나, 천민출신의 묵자는 비록 유학을 배웠으나 주제(周制)의 부흥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사회개혁을 부르짖으며 봉건사회가 해체되어 평등하고 합리적인 사회가 하루빨리 출현하기를 바랐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박문현, “묵가의 겸애와 비공평화론”, [통일전략], 제7권3호, (한국통일전략학회, 2007).
풍유란 저, 『중국철학사』, 정인재 역, (형설출판사, 1987).
김교빈 이현구 저,『동양철학 에세이』, (동녘 ,1993).
馮友蘭, 『中國哲學史』 정인재 역 (대구:형설출판사, 1983).
<초록>
공수반과의 일화 (6p 관련)
과학기술의 명인이며 군사전문가이기도 한 공수반(公輸盤)이 초나라를 위하여 성을 공격하는 운제를 만들어 송나라를 침략할 준비를 하였다. 묵자는 노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즉각 출발하여 열흘 낮과 열흘 밤을 달리어 초나라의 도읍인 영()에 이르러 공수반을 만났다. 묵자가 말하기를 “초나라는 여유있는 땅을 가지고 있으나 백성들이 부족합니다. 부족한 백성을 죽임으로써 여유 있는 땅을 위하여 다툰다는 것은 지혜롭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송
나라는 죄도 없는데 그 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어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알면서도 간(諫)하지 않는 것은 충성되다 말할 수가 없고, 간(諫)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강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의로움으로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것과 여러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일의 ‘유(類)’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즉 초나라가 죄도 없는 송나라를 침략한다는 것은 ‘부지(不智)’ㆍ‘불인(不仁)’ㆍ‘불충(不忠)’ㆍ‘불강(不强)’ㆍ‘부지류(不知類)’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이러한 묵자의 논리적인 설득에 굴복한 공수반은 그 책임을 임금에게 미룬다. 묵자는 초나라 임금을 직접 만나 말하기를 “지금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가진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좋은 수레를 버려두고 이웃에 있는 다 낡은 수레를 훔치려 합니다. 그의 수놓인 비단 옷은 버려두고 이웃에 있는 짧고 볼품 없는 옷을 훔치려 합니다. 그의 맛있는 기장과 고기는 버려두고 이웃에 있는 겨와 지게미를 훔치려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어떠한 사람이라 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론 도적질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겠지요.”라고 했다. 크고 부유한 초나라가 작고 가난한 송나라를 침략하는 것도 자기가 가진 것이 많은 데도 하찮은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벽과 같다는 것이다. 묵자가 다시 “저는 임금님의 관리들이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는 것도 앞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의로움만 상하게 될 뿐 얻어지는 게 없을 것으로 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은 말씀이오. 비록 그러하다 하더라도 공수반이 나를 위하여 운제를 만들었으니 꼭 송나라를 빼앗아야만 하겠소” 라고 했다.
임금은 다시 공수반이 만든 운제를 핑계로 묵자와의 논변을 회피한다. 이에 묵자는 다시 공수반을 만난다. 묵자는 허리띠를 끌러 성을 만들고 나무 조각으로 기계를 삼았다. 공수반은 성을 공격하는 방법을 아홉 번이나 바꾸면서 기계로 공격했으나 묵자는 아홉 번 모두 이를 막아 냈다. 공수반은 성을 공격하는 기계의 방법을 다하였지만 묵자의 수비에는 여유가 있었다. 마침내 공수반이 묵자에게 굴복했다.
묵자는 다시 초나라 임금에게 말하기를 “공수반의 뜻은 다만 저를 죽이려는 것 뿐입니다. 저를 죽이면 송나라는 초나라의 침략을 막아낼 수가 없을 테니 쉽게 공격할 수 있을 거라는 거지요. 그러나 금골희 등 저의 제자 3백명이 제가 발명한 군사 무기를 가지고 이미 송나라 성 위에서 초나라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저 하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그들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고 하니, 초나라 임금은 “알겠습니다. 나는 송나라를 침략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굴복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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