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 전우의 성사심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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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전우의 성사심제설
간재 전우의 일생
일생을 통해 한번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지만 재야 학자로서 초야에 묻혀 오직 고고한 학자로서 훈도에 전념했던 인물 간재 전우. 훗날 학자들은 그를 일컬어 한말의 으뜸가는 성리학의 거장으로 일컫고 있다. 탯자리는 전주 청석교다. 기록을 보면 그의 귀가 얼굴에 비해 컸으며 목소리가 힘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가세가 넉넉한 탓에 일찍 학문을 배워 시문에 능했다. 18세에 결혼했으나 공부에 미쳐 책을 싸들고 입산했다. 이때부터 심오한 고전에 탐닉하게 되어 시문에 일가를 이루었고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당시 선비들은 조선말의 어지로움에 지쳐 正道의 스승을 찾고 있었다.
간재도 <퇴계집>을 읽은 후 스승을 찾아 충청도 아산의 임헌회를 찾아갔다.
22살의 용모가 수려하고 눈이 빛나는 청년에게 스승 임헌회의 눈에 들었다.
둘은 이후 20년간 관계를 맺으며 학문을 나누었다.
30살의 간재. 스승의 뜻에 따라 <오헌수언> 14권을 편찬했다. 이 저서는 이조 성리학의 5대학자로 지칭되는 조광조·이퇴계·이율곡·김장생·송시열등의 저서 속에서 발췌하여 엮은 것. 간재는 이 다섯 학자를 조선 성리학의 커다란 맥락으로 이해하려 하였고 이들을 통해 이조 유학의 연원을 찾아 후대의 立敎明道에의 규범을 삼고자 한 것이다. 간재는 이 5대 인물 이후의 홍직필, 그의 스승 임헌회를 거쳐 유학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이르렀다는 확신을 갖고자 한 것 같다.
여하튼 그의 명성은 경향 각지에 퍼졌다. 고종은 그에게 강원도사의 전지를 명했다. 그러나 그는 군자출처의 명분을 내세워 관직을 사양했다. 그러나 야인생활 시간이 늘어갈수록 그는 구차하여갔다. 간혹 제자들로부터 답례의 뜻이 있었지만 번번히 묵살됐다. 간재는 생활고를 이유로 식솔을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46세에는 진천 만죽으로 이사했는데, 굶기를 밥먹듯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말 검소한 사람이었다. 입는 옷이란 게 항상 무명으로 짠 것이었고 끼니를 거를 정도였지만 자식과 제자들에게는 한 공기의 밥을 먹을 때라도 백성의 노고를 생각하고 하늘에 감사하라고 ‘食時五念’을 지어 가르쳤다고 한다.
혼란으로 치닫던 내외정세에 관심을 일체 보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던 간재도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이 발표되자 반기를 들었다. 제자들에게 義에 합당치 않으니 상투관을 고수할 것을 지시했다. 조정의 친일 개화파들은 그가 수구적 모화파라 하여 고종에게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듣지 않고 그의 나이 54세 되던 해 사헌부 장령이라는 벼슬을 특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위기가 이미 극에 달하여 이를 담당할 재기가 아님을 주장하고 사양하였다. 고종은 다시 순흥부사를 제수하였지만 이 역시 받지 않았고 그후 정3품 통정대부 비서승, 중추원 참의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첩지를 펴보지도 않고 서재만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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