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각 오의 신앙인 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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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사각오의 신앙인 주기철>
주기철 목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에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신앙인이자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에서 주현성 장로의 4남 3녀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고서 깊은 감동을 받아 후에 멀리 평북 정주까지 가서 오산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오산학교에 다니는 동안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일제에 저항하는 것이 민족과 교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1916년 19세에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남강과 고당의 권유에 따라 헐벗고 굶주리는 민족을 배불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눈병이 악화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웅천으로 돌아와 웅천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며 야학과 청년 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던 중 1930년 3월 30자 동아 일보에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기사를 보고 마산 문창 교회에서 열렸던 그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집회도중 그는 자신을 압도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을 느끼면서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없이는 자신은 너무도 나약한 피조물이요 죄인일 뿐이라는 깨달음 이었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독립을 외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나서려는 자신이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인가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와 헌신의 마음으로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졸업 후 1925년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26년 1월 1일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더욱 노골적이고 억압적인 방법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인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를 위하여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하여 외우게 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제정하여 학교와 관공서에서 아침 조회 시간마다 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조선인을 신도 의식에 참여하도록 법을 제정하고 신사참배를 의무화 하였으며, 살아 있는 신이라고 일컬었던 일본 천황의 사진과 일장기 사진 등을 학교 교실마다 붙여 놓고 매일 학생들에게 경배하게 하였습니다. 신사참배는 조선인들의 민족정신 말살 정책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와 내선일제를 강요하는 폭압적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회는 처음에는 신사 참배가 우상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날 뿐 아니라 한민족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본의 계책임을 알고 산발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신사 참배 반대자들을 구속하고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를 폐쇄하였으며, 신사 참배를 찬성하는 목사들을 내세워 교회마다 다니며 찬성 설득 강연을 하게 함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을 회유하고자 하였습니다. 1938년 9월 한국 장로교회 총회까지 신사 참배를 가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 교회의 산사 참배 가결은 한구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었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책략에 맞서 주기철 목사는 이미 신사 참배 거부 안을 경남 노회에 제출, 가결케 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935년 9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선교 50부년 기념 부흥사경회에서 행한 ‘일사각오’라는 재목의 설교와, 같은 해 금강산에서 열렸던 목사 수양회에서 한 ‘예언자의 권위’라는 설교에서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과 한국 교회 신앙의 순결을 위한 신앙 정신이 어떠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1938년 2월 8일 산정현교회를 새로이 건축하고 헌당식을 하는 당일,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를 평양 경찰서에 검속 하였습니다. 1944년 순교하기 까지 5차례에 걸쳐 총 5년 4개월 동안 그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과 관련한 투옥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1940년 2월에 잠시 석방되어 평양 산정현교회로 돌아온 주기철 목사는 주일날 그가 입던 옷 그대로 입고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갖고 강단에 섰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투철한 신앙과 민족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마침내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30분경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붙잡으소서.”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의 한 부분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100년 전에도 이런 존경스런 기독교 인물들이 계신지 이번 수업을 통해 새삼 느꼈습니다. 저도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서 인지 위의 마지막 설교 부분이 정말 제 마음을 깊숙이 찔렀습니다. 누구나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무게는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1달란트와 5달란트의 비유처럼 남의 십자가와 내 십자가를 비교하며 원망만 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지 상상할 수 있는 문구입니다.‘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에스더의 고백처럼 주기철 목사도 자신의 목숨을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나라를 위해 주님의 일을 위해 망설임 없이 바치셨던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번 레포트를 통해 나의 부족한 모습을 비춰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고 앞서간 선지자들의 모습을 본받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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