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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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 누구나 그렇듯 이순신 장군 하면 이 말부터 떠오른다.나만 그럴지도 모르나 적어도 나의 머릿속에 이순신 장군은 용맹하고 두려움 없이 조국과 조선의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분이라도 세뇌되어 있었다. 멋진 거북선을 만들어 적을 무찌르는 그는 많은 남자아이들로부터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었다. 하지만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렇듯 신성하게 포장되어왔던 이순신을 좀더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책에서 내가 그토록 귀에 박히게 익숙해져왔던 이순신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이순신의 입장에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임금을 기만했다는 죄로 백의종군할 때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 2년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화려한 공 밑에 가려져 있던 백성들의 한 많은 고통, 아픔들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전쟁이 낳은 공포심과 허무감, 군중이 아닌 개개인……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고뇌…… 칼로 베어지지 않는 것들을 칼로 벨 수는 없었다. 각각의 개별적인 것들을 벨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순신은 이 개별성 앞에서 참담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적들의 머리를 소금에 절이면서 하나씩 죽일 때 그들의 울부짖는, 웃고 있는 표정들을 바라보면서 이순신은 그렇게 말한다. 아들 면의 죽음도 적과의 싸움도 그렇고, 적들이 서로의 화살에 쏘이고, 칼과 창을 맞으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과 무서움도 이 모두가 각자의 몫이라고. 서로 소통될 수 없는 개별적인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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