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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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박은식에 대하여
1.약력
본관 밀양. 자 성칠(聖七). 호 겸곡(謙谷)·백암(白巖)·태백광노(太白狂奴). 10세 이후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고,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주자학 연마에 심혈을 기울여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날렸다. 학문적 계보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찍부터 신기영(申耆永)·정관섭(丁觀燮) 같은 정약용(丁若鏞)의 문인들과도 접촉하면서 그의 실학사상을 체득하였다. 26세를 전후하여서는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사사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 1888∼1894년까지 숭인전참봉·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0년대 서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상도 종래의 정주학(程朱學) 중심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하는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기관지 《서우》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이 밖에도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하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민중계몽 ·교육 ·언론 활동도 1910년 국권피탈과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桓仁縣]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국사연구를 통하여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등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博達)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지었다.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한족공보(韓族公報)》 발행에 관여하던 중 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이에 그는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이를 간행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방법·지연·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정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靜安吉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는 그의 독립활동과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에 머물긴 했지만 역사 연구와 서술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박은식의 사상
2.1 유교사상
그는 종전의 주자학자로서 그 시대적 폐풍을 지적하면서 그 편협성과 난해함을 벗어나 시의(時宜)에 알맞는 유학의 정립을 양명학에 의해서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당시 사회여론 가운데 유림계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음에 대하여 박은식은 스스로「나는 대한유교계의 일분자(一分子)라」고 자처함으로써 그에 대한 대응방법으로서 소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전개한 것으로 해석되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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