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 Pierrede Ferm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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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페르마(Pierre de Fermat)
1. 서 론
17세기 초 프랑스는 근대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는데 데카르트와 페르마가 그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개성, 출신, 직업 등 여러 면에서 달랐고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다. 데카르트가 수학을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인 철학의 예리한 논리를 시험해보는 한 도구로 인식한 반면, 페르마는 수학 자체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학을 주로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우거나 아니면 수학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배우게 되지만 페르마처럼 숫자와 도형으로 이루어진 신의 장난감인 수학을 공부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다른 수학자들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 페르마는 수학의 네 분야에 영향력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페르마는 데카르트와 함께 해석기하학의 기초를 세운 수학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극대, 극소, 접선을 찾는 방법, 그리고 단순한 곡선들의 면적을 구하는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미적분학 도입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파스칼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확률론의 기본이 되는 아이디어를 체계화했고, 그의 소수, 가분성, 정수의 거듭제곱에 관한 정리와 추측은 현대 정수론의 발전을 가져왔다.
2. 페르마의 생애
페르마는 1601년 8월 17일에 프랑스 남부의 보몽 지방에서 태어났고, 8월 20일에 세례를 받았다고 가톨릭교회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도미니크 페르마는 보몽 지방의 집정관이자 피혁 장수였으며, 어머니인 끌레 드 롱은 고등법원의 일원으로서 법복 귀족 계급에 속하였다.
프란체스코회 학교에서 고전어와 고전문학을 배운 후 툴루즈의 대학에 입학한 페르마는 오를레앙 대학에서 민법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1631년 5월 그는 툴루즈의 법정에서는 지방 청원 행정관으로 일했다. 이런 지위는 그의 이름에 사회적 지위의 지표로서 ‘de’를 이름에 덧붙일 수 있는 명예를 주었다. 그해 6월 그는 외사촌누이인 루이스 드 롱과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낳았다. 고령의 법정 공무원들의 사망으로 인해 페르마는 1638년 조사 변호사라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었으며, 1642년에는 형사법원과 대법원으로, 1648년에는 툴루즈 지방의 칙선위원으로 당선되어 왕의 지방의회로 옮겨 나랏일을 하며 일생 동안 특별한 어려움 없이 평화로운 인생을 살았다. 그는 이익 없는 논쟁은 피하면서 평생을 조용하고 온건하게 살았으며, 특이하게도 학생 때 그의 생애에 대해 남은 기록이 거의 없었다. 천재적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는 것은 그의 업적들과 성취한 것들로부터 명백하다. 수학과 수론의 이론에서 그의 경이적인 업적은 일반적으로 그의 학창 생활에서 추적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학창시절에 관해 공개된 게 없고, 가장 위대한 업적이 자신의 연구로 제시된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5개 국어에 능통한 페르마는, 라틴과 그리스 문헌학에 대한 에세이를 썼으며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시를 쓰는 것을 즐겼다. 1620년대 후반부터 그가 죽던 1665년 1월 12일까지 개인적인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할 만큼 그의 열정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바로 수학이었다. 그는 수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전문적인 수학자는 아니었다. 그에게 수학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공부하는 학문이었다. 취미로 여긴 학문에서 이름을 남길 정도이니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전문적으로 수학을 연구하는 수학자 못지않게 수학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을 세웠다. 페르마는 데카르트와 함께 해석 기하와 미적분 분야의 개척자로 알려졌고, 파스칼과 함께 확률론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특히 정수론 분야에서는 ‘현대 정수론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17세기 최고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여러 분야의 전문적인 수학자들에게 편지로 그가 한 수학적 발견들을 전했다. 또한 여러 대학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연구 결과의 발표를 거절했으며, 생각의 논리적 전개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정리에 대한 증명을 어느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와 서신 왕래를 한 수학자들은 페르마의 아이디어의 많은 부분을 해석기하학, 확률론, 미적분학과 관련된 자신들의 출간물에 통합시켰다. 정수론에 대한 깊은 연구는 1세기 후에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와 그와 동시대를 함께 한 사람들이 그의 많은 업적을 발견할 때까지, 대부분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3. 페르마의 업적 (해석기하학)
페르마는 1620년대에, 16세기의 프랑스 수학자 비에트의 대수학 연구들을 출간하는 일을 하던 수학자들과 함께 보르도에서 공부를 하며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같은 시기에 그는 그리스 수학자 아폴로니우스가 쓴 고전 기하학 저서인 <Plane Loci(평면 궤적)>을 재구성하는 중이었다. 아폴로니우스가 직선과 원을 형성하는 점들의 집합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얻기까지 거쳤던 추론 과정을 다시 재연하기 위해 페르마는 비에트의 새로운 대수적 방법들을 사용했다. 그는 축이라 불리는 수평선을 토대로 한 좌표체계와 축과 이루는 각이 고정된 크기를 갖는 움직이는 직선을 도입하여, 주어진 임의의 선이나 원 위의 점들의 자취를 묘사하기 위해 두 개의 변수를 사용한 방정식을 만들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단순한 형태를 갖는 이러한 두 개의 곡선에 대해 대수적 방정식과 기하학적 도형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아폴로니우스의 저서를 재구성하는 일을 마친 후 2년 동안은 좀 더 일반적인 방정식 이론과 그래프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Ad locos planos et solidos isagoge(평면과 입체 궤적의 입문)’이라는 논문에서 이 이론들을 설명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ax ^{2} +by ^{2} +cxy+dx+ey+f=0 형태의 모든 방정식이 직선, 원, 포물선, 쌍곡선, 타원을 묘사한다고 설명했다. 삼차원 원뿔을 평면으로 잘라 얻을 수 있는 포물선, 타원, 쌍곡선의 기하학적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원뿔의 절단면의 세 가지 형태를 의미하기 위해 ‘입체곡선’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직선과 원을 의미하기 위해서는 ‘평면곡선’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방정식과 기본적인 함수 그래프 사이의 조직적인 연결을 정의함으로써, 해석기하학으로 알려진 수학의 한 분야의 기초를 다졌다.
1636년 아직 발표하지 않은 두 개의 원고를 파리에 살고 있는 예수회 사제이자 프랑스의 수학자였던 메르센에게 보냈다. 메르센은 프랑스 전 지역의 수학자들과 새로운 발견들에 대해 서신 왕래를 하면서 수학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또 다른 프랑스 수학자 데카르트는 ‘Discours de la methode bien conduire sa raison et chercher la veite dans les sciences(정확하게 논거를 제시하고 과학적 진리를 찾는 방법에 대한 논문)’의 원고와 수학 부록인 ‘La gemerie(기하학)’을 마무리 짓는 중이었다. 데카르트의 논문에도 페르마가 설명한 대수학과 기하학을 연관 짓는 기술이 동일하게 나타나 있지만 접근 방법에 있어서 두 사람은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페르마는 대수방정식에서 시작하여 대응하는 곡선을 만들어낸 반면, 데카르트는 곡선에 대한 기하학적인 묘사로부터 곡선의 방정식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독립적으로 각자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간 두 수학자 모두 오늘날 방정식과 그래프를 연결 짓는 방법을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데카르트의 연구가 좀 더 일반적인 함수들을 다루었고 그의 논문이 출간된 1637년 이후 이런 방법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해석기하학의 발견과 그의 이름을 더 자주 관련지으며 여전히 x,y좌표 체계를 ‘데카르트 좌표(Cartesian coordinates)’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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