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과 김일성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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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박헌영과 김일성의 갈등
박헌영
공산주의 운동가.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 대표자대회에 참가한 뒤에 국내에 공산당 조직을 건설하려고 귀국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출옥 후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1925년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그 해 11월에 조선공산당 결성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풀려났다. 1928년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2년간 공부했으며, 그 뒤 상하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았다. 1939년에 출감해 공산주의 조직인 ‘경성콤그룹’을 만들었으나, 일본의 탄압을 받아 전라남도 광주(광주광역시)에서 은신했다.광복이 되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여운형과 연합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46년에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으로 미국정이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자, 북한으로 탈출했다. 그 해 11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합쳐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북한에서 당 활동을 지도했다. 1948년에 북한정군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이 되었지만,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625전쟁 때 인민군 안에 총정치국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했으나, 1953년에 반국가활동 혐의 체포되었고 그 뒤에 처형되었다.
김일성
북한의 전 주석. 평안남도 대동에서 김형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이다. 1919년에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갔다가, 1923년에 평양으로 돌아와서 외가가 있는 칠골의 창덕학교를 다닌 뒤 다시 만주로 갔다. 1926년 10월에 만주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고, 이듬해 길림(지린)성에 있는 육문(유원)중학교에 입학하여 조선공산주의자청년동맹을 조직했다.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운동에 뛰어들어 1932년 4월에 안도(안두)현에서 우리 나라 동료들과 함께 반일인민유격대를 결성했다. 그 후 항일유격대가 개편된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구의 간부를 지냈다. 1936년 5월에는 조국광복회를 결성했으며, 이듬해 6월에 동북항일연군 병력 100여 명을 이끌고 조국광복회의 국내 지하조직과 연합하여 함경남도갑산군의 보천보를 공격했다. 그러나 1939년 말부터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자, 1941년 봄에 유격대를 이끌고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1942년 7월에 동북항일연군의 후신으로 동북항일연군교도려가 조직되면서 이 부대의 제1영 영장이 되었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0월 14일에 열린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뒤 공산당과 권력기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토지개혁 등을 추진했다. 1946년 8월에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을 합당해서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하고 부위원장을 맡았다.1947년 2월에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 되고, 1948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이 되었다. 1950년의 625전쟁 때에서 내각 수상으로 있으면서 군사위원회위원장과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전쟁이 끝난뒤 복구사업을 벌이면서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농업의 동시 발전’ 노선을 제창했다. 이 노선에 대해 조선노동당 안의 일부 세력이 반대했지만, 이를 누르고 확고한 정차 기반을 닦았다. 1960년대에 들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유일지도체계를 강화했으며, 이 시기부터 이른바 ‘주체사상’을 주창하여 북한의 유일사상으로 만들고자 했다.1970년대에 들어 주체사상을 북한 사회에 적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론 체계를 세웠다. 이외 더불어 김일성 유일지도체계가 더욱 강화되어, 1972년에 새로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에서 신설한 국가 주석에 취임했다. 이 헌법에서는 주석이 국가의 수반이면 국가 주권을 대표한다고 규정되어, 내각 수상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진다. 1980년대에 아들인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권력 계승 작업을 진행했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10여일 앞둔 1994년 7월9일에 사망했다.
해방 정국에서의 좌익의 갈등
1)인민 전선인가, 민족 통일 전선인가?
박헌영 인민전선논리
첫째, 그가 여느 공산주의자와는 달리 한국의 역사에 대하여 깊이 고뇌함. 인민전선에서 민족해방에 해답을 찾은 것 이라고 볼 수 있음.
둘째, 그는 누구보다도 계급적 적의가 강했다는 점. 그는 아무리 민족의 해방이나 통일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지주를 용서 할 수 없었음.(그는 봉건지주의 서자로 태어남)
김일성 민족 통일전선 논리
첫째, 농촌에서 나와 공업노동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는 어제의 농민이 오늘 노동자로 되었다하여 노동계급의 의식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음.
둘째, 애국적인 사람들을 자선가라고 하여 타도하거나 따돌린다면 수많은 군중을 잃게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 민족해방이라는 대전제를 첫 자리에 놓는다면 어떤 계층과도 손을 잡을수 있다는 민족통일 전선이 그의 견해.
2)전위(前衛)인가, 민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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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등 중 하나는 조중연합사령부를 둘러싼 북조선-중국 관계였다. 김일성은 군사적 지휘권을 중국에 인도하고 정치적 통제권도 빼앗긴 셈이었고 박헌영과의 타협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인민군내 당단체가 조직되고 1951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원확대정책이 전개되면서 인민군이 당의 군대라는 사고방식도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군사단일제를 원칙으로 하는 한 당지도와의 관계는 계속 마찰을 일으킬

  • 북한의 근현대사
  • 박헌영이 “중앙당에 속하되 북부 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간기구로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고 해 김일성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10월 10일, ‘조선공산당 이북5도 책임자 미 열성자대회’를 열어 당 창건을 위한 예비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이북5도당의 정치노선조직노선과 정세판단에 관한 것이었다. 국내파들의 ‘인민전선’주장과 빨치산파의 ‘민족통일전선’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결과적

  • 학살, 한국전쟁이 정치사회에 미친 영향
  • 박헌영이 대표주자인 국내 공산주의 세력들,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항일무장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중도파인 건국준비위원회로 나누어 볼 수 있다.(1) 대한민국 임시정부1) 초기임시정부의 초기는 좌우세력을 망라한 정치세력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좌파세력의 중심인물인 이동휘, 중도세력의 김규식, 우파세력의 안창호를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년 4월 11

  • 북한의 권력 승계
  • 김일성 자신와 뜻을 달리하거나 걸림돌이라고 생각되는 자를 모조리 숙청한 것은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종파사건’에서 였다. 김일성에 반대하는 이들이 김일성을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되려 김일성에게 모두 숙청당하게 된다. 북한의 복종과 저항의 정치: 생산현장에 나타난 공식/비공식 사회관계 남근우 한양대학교 논뭄(3)1인 지배의 완성(1960)북한 정치권력의 초기 갈등을 완벽하게 봉합한 1950년대의 반종파 투

  •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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