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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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부 수립 문제로 내부갈등이 심화된 우리나라에는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었다. 그 중 대표 인물들로 갈등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극좌익에는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 중도좌파에는 여운형, 중도 우파에는 김구, 극우익에는 이승만으로 압축이 될 수 있다. 극좌익과 극우익은 나라가 쪼개 일지언정 절대 상대정당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고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는 통일을 좀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유엔 소총회에 의해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 우선 총선거를 하라는 안이 발표되자 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 되자마자 단독 정부론을 지지하던 이승만은 단독 정부 수립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좌익세력들은 단독 정부 수립 저지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민족주의자인 김구과 김규식, 중도세력들은 남북 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으려 하였다.
2. 남북 협상의 전개
나는 통일 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
이승만과 한민당이 단독 정부 수립 노선을 본격화하자 1948년 2월 김구, 김규식은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요인 회담을 제의하였다. 따라서 1948년 4월에 김구, 김규식, 조소앙, 박헌영, 백남운 등 남측 대표 11명과 북측 대표 4명이 참여한 가운데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리게 된고 미소 양국 군대 철수와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결정했다. 하지만 남북 협상은 마지막으로 좌우가 합작했다는 점에서의 의의는 있지만 김구는 남조선의 공식 대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던 미국이 남북 협상의 결의안을 수용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적인 방법도 없을뿐더러 미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의견차이고 남북 협상은 결실 없이 끝나버렸다.
3.제주도 4.3 사건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미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며 김달삼과 남조선노동당세력의 주도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4.3사건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1947년 3.1절 기념 시위 과정에서 미군 군정에 대한 불만으로 집회를 하던 도중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6명이 사망한 일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시위 주체와 무관한 일반 민간인들이라서 제주도민들이 불만을 토로했고 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미군정은 군대를 파견, 극우 단체였던 서북청년단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불만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에 발맞추어 터져 일부 좌익 세력이 한라산을 기점으로 유격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순경의 무리한 진압 작전으로 수만명의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사망자들은 모두 좌일 반란군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제주도 4.3 피해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많았다고 한다. 공비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한 마을이 몰살당한 북촌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리하여 제주도 두 선거구의 선거는 무기 연기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선거인 남한 총선거가 사실은 전국적으로 실시된 선거가 아니라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제주 4.3 사건과 연계되어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여수 순천 군대의 좌익 세력 일부가 4.3 사건에 의한 출동 명령이 떨어지자 무고한 민간인을 죽일 수 없다며 좌익 세력 선동에 의하여 우익 세력을 무차별 사살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는 해방 직후의 이념간의 가장 큰 갈등 사건으로 여겨진다.
<4.3.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수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다.
순이 삼촌 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 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 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4.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단일 정부 수립에 대한 여러 가지 갈등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중도파과 좌익 세력들이 대거 불참한 가운데 우익당 한민당을 중심으로 이승만 세력인 보수 우익 세력들이 국회를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7월 제헌을 통하여 헌법을 세워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광복이 된지 3년 바로 그 날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그해 12월 유엔에게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로 승인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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