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이규보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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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序 論
1170년 무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의 해체, 지방의 중소지주 계층의 부상, 민중의 역량과 의식의 성장 등 고려 전기와는 다른 변혁의 양상을 보였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문신을 학살하고, 의종을 폐위한 후 무신정권의 시작을 알렸다. 이규보는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68년에 태어난 문인으로 주로 무신정권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이규보에 대한 초기의 평가는 문학사를 서술하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동방의 시호", "문장의 화신" 등 대체로 작가의 천재성과 문학의 우수성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으로 개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규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가 남긴 작품 자체보다는 생애 속에서 조망해야 하며, 그의 작품 역시 작가의 삶을 기반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기에 본고에서는 이규보의 생애를 중점으로 하여 그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本 論
이규보는 개성의 관리(官吏)로 있던 부친을 따라 소년시절을 개성에서 보냈다. 당시의 개성은 무신정변으로 유혈이 낭자하던 소란스런 수도였음에도, 그는 시공부에 열중하면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아홉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시서육경(詩書六經)·제자백가(諸子百家)·사필(史筆)의 글로부터 유경벽전(幽經僻典)·범서(梵書)·도가(道家)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은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백운소설」, 민족문화추진회 역, 『동국이상국집』6, 254면, 1984.
「백운소설」에서 나타난 그의 회고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어려서부터 글에 대한 관심이 뛰어났으며, 14세에는 최충(崔)의 문헌공도(文憲公徒)로 공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6세, 18세, 20세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세 번 모두 낙방하고 말았으니 「연보」의 기록대로 그것은 자기의 생각과 감흥을 자유롭게 읊조리는 시에만 힘쓰고 과거공부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시(科擧時)의 양식을 의식하면서 시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시문(時文)에 정열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중요한 사건과 인물 산천에 대한 것을 거의 외우는 등 작시(作詩)에 있어 적재적소에 활용할 모든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東國李相國集>의 연보는 젊은 시절 이규보의 계속된 낙방이 그가 자신의 능력을 믿어 평소 과거지문을 공부하지 않고 풍월을 일삼기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규보는 23세에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한다. 당시 그는 하등급의 급제가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여 사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듬해 그는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 후 이규보는 천마산에 들어가 스스로를 ‘白雲居士’라 칭하고, <백운거사어록 東國李相國集 全集 第20券 語錄 中 <白雲居士語錄>
>, <백운거사전 東國李相國集 全集 第20券 傳 中 <白雲居士傳>
>을 지어 백운처럼 거리낌 없이 살며, 거사처럼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한편 <보광사에서 東國李相國集 全集 第10券 古律詩 中 <是日宿普光寺用故王書記儀留題詩韻贈堂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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