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사료 분석을 통해 본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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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료분석을
통해 본 세계관
『삼국사기』「백제본기」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鳥干{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미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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