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와 제5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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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5공화국은 1979년 10·26 사건과 12·12 쿠데타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이다. 10·26 사건으로 새로 등장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월 12일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차지하였고(12·12 쿠데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공포하였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다시 좌절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 구현, 복지 사회 건설 등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하여 얼마 안 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제5공화국은 그 운명을 다한다.
신군부세력
신군부라는 세력의 형성은 하나회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회는 5공을 출범시킨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모여 만든 일종의 군부내 사조직이다. 그들이 육사 생도이던 시절 오성회라는 단체를 만든 것이 그 뿌리인데 발단은 육사 10기생까지의 선배들에 대한 불만으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전까지는 6개월간의 훈련만 받고 임관을 하였지만 자신들은 정규4년제 교육을 받아 더욱 우월한데 선후배간의 관계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근한 후원도 한몫을 했다고도 한다. 그들 조직은 한마디로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사람에게 권력과 부를 주어서 충성을 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위관급 장교(소위,중위,대위)가 되면서 멤버를 보강하여 칠성회가 되었다가 나중에 육사 11기생을 지칭하는 텐 멤버로 발전하게 된다. 위로는 박정희의 세력을 등에 업고 아래로는 육사출신 후배들에게 엘리트 의식을 심어주면서 박정희 사망이후 세력을 잡은 신군부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10·26사건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車智澈)을 살해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우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의 강경노선이 채택되자 그의 견제로 김재규가 진퇴위기에 몰렸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미국의 음모라는 설도 있으며, 김재규의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설 또한 제기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12.12군사반란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한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10·26 사건)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대행으로 취임하여 12월 6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대회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규하의 선출은 어디까지나 유신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선출된 대통령이 군부가 아닌 민간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독재체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라, 서울의 봄 이라고 불리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 소장은 제9사단장 노태우 육군 소장 등 영남출신 고급장교들로 이루어진 군부내 비밀사조직 하나회를 동원하여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계엄 사령관직에 있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노재현 국방부장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구금하고, 국방부,육군본부, 수도경비사령부 등 주요 군 시설을 점령하여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회 출신 군부세력 장교들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인 김오랑소령을 사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방부와 육군 본부를 점령하고 국방부 장관도 체포하여 군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군의 숙정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므로 숙군 쿠데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광주민주화운동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또는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주의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12·12 군사 반란를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공수부대 등을 계엄군으로 동원한 신군부의 유혈진압으로 피살자 191명, 부상자는 852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광주를 비롯한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이후 반독재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한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미국을 한국전쟁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재고되었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은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하였으나, 1988년 5공청문회를 거치고 제6공화국이 출범된 후인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여,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특별법과 관련법률이 제정되면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비자유 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1987년 6월 항쟁
6월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이라고도 한다. 그 해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였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전국적 민주화투쟁의 구심체로 결성하였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결국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되고, 새 헌법에 따라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8년 2월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종료되었다. 6월항쟁은 전두환정권의 권위주의적 권력유지를 민주세력과 시민의 역량으로 저지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나회(신군부)의 몰락
1993년 3월 서울 용산구 삼각지 부근 국방부내 주차장에서 일이다. 주차장내 차량들 앞 유리에 전단지가 붙어 있었는데 내용인 즉 "정치군인 몰아내자! 하나회가 왠말인가! 문민정부 시대에 아직도 지난날의 정치군인이 고위직을 점하고 있는가? 군이 진정 새롭게 태어나려면은 순수한 야전군 지휘관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하나회를 몰아내자!" 이었는데 당시 아연실색한 권영해 국방장관이 긴급 지시하여 문제의 전단지를 뿌린 문제의 하사를 긴급 체포하였는데 조사를 하여 보니 현역 대령이 뒷 배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응책을 모색하는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후 1주일 정도 지나서 아침에 갑자기 권 국방장관을 불러 아침을 주면서 "이제 군도 정리해야 하고 이참에 육군 참모총장부터 새로 인사를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육 참총장에게 예편 준비를 하라고 하세요!" 라는 말을 남긴다. 이것이 하나회 몰락의 서막이었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는데 계룡대에서 참모회의를 주재하던 김진영 총장은 난데없는 예편 결정에 당황했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 후임에는 육사 17기의 수석졸업생이던 김동진 중장이 대장으로 진급하여 임명된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명령으로 하나회 소속이던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을 인사조치하여 예편시키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지휘관들을 임명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1994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하나회 소속 이충석 합참작전국장이 합참 간부 회식석상에서 하나회에 대한 제거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품고 술기운에 난동을 부리고 만다. 결국 대노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다음날 가차 없이 보직이 해임되었고 전군에서 하나회원들을 색출하라는 지시를 내려 하나회 출신 들은 대부분 예편조치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하나회의 역사는 군부에서는 사라지게 되었다. 한때는 잘나가던 조직이었으나 그 모습들이 결국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참극과 비극을 가져다준 하나회의 말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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