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자기와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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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392년, 누적된 모순으로 인해 고려왕조는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다.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은 신진 사대부였고, 건국의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의 수용은 종교적인 교리로 통치되던 사회에서 정치와 행정에 의해 통치되는 합리적인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기, 권문세족에 대항하는 신진세력으로 부상하면서 토지를 중심으로 한 고려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모순을 인식하고, 성리학을 이론적, 실천적 도구로 삼아 구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선이라는 새 시대를 열어 나갔다. 성리학은 이와 기를 중심개념으로 우주 자연의 운행원리와 인간의 심성 문제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였다. 성리학이 다른 사상과 다른 점은, 현실에서의 실천을 중시한다는 점이었다. 성리학은 철학이었을 뿐 아니라 사회규범이라는 독특한 성격의 이데올로기였다.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의 이론 정립과 실천을 통해 불교를 배척하고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개혁해 나갔다.
한편 조선 건국의 결정적인 공헌자는 다름아닌 민중이다. 민중은 단순한 피지배 계층이 아니라 조선 개국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세력이었다. 왕의 입장에서 백성은, 양반 사대부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집단으로서 인식되기에 이른다. 민본사상과 한글창제도 그러한 시대정신의 변화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민본주의를 국시로 삼았지만, 타고난 신분의 차이는 인정하며 지배집단의 이익을 고수하였다.
b. 예술적 문화적
15세기는 한국 미술의 개화기로서,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만들어졌고, 수준 또한 다른 어느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특히, 학문과 기예를 겸비한 사대부들의 미술 참여는 조선의 미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그림을 통해 정신적인 수양과 학문의 완성을 도모했다. 성리학은 정신적인 면, 생활적인 면 뿐만이 아니라 미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또한, 조선 초기 사변적 측면보다 실제를 중시하는 유교정신은 자연 현실을 중시하였고, 그 결과 사실주의가 생겨났다. 그러나 조선의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서양의 사실주의와는 달리, 성리학적 세계관에 토대를 둔 사실주의였다. 성리학이 근원적으로 추구한 것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의 근본적인 원리, 이(理)의 세계였기 때문에, 조선 시대의 그림에는 관념적인 측면이 개입될 수 밖에 없었다. 이기(理氣)의 합일, 관념세계와 물질세계가 결합된 사실주의가 조선의 사실주의이다.
또한, 조선초기의 진취적 정신은, 영모화, 화조화 등 다양한 미술 장르를 낳게 했다.
17세기 중엽에는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변화된 환경과 그 변화된 환경 속에서 키워진 새로운 세계관은, 중국 화풍의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경치를 있는 그대로 본대로 그리는 화풍이 생겨나게 했다.
후기로 들어서면서, 민중이 문화의 주도자로서 부각되게 된다. 17세기 농사기술의 발전과 함께 경제력을 가지게 된 농민들이 등장하면서 사회구조가 경제중심으로 옮겨가고, 신분제도의 붕괴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불러 일으켜, 농민이 주체가 된 풍속화, 민화등이 등장하게 된다.
사대부들의 소박한 세계관은 생활용품에도 반영이 되는데, 청자가 백자로 바뀌는 고려말 조선초에 등장한 분청사기는 그 중의 하나였다. 분청사기는 철분이 강한 탁한 맛과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호탕한 필치, 자유스러운 문양이 그 특징이었다. 호방한 필치로 거침없이 그려진 분청사기의 그림들은 회화작품 못지 않게 뛰어났다. 그러나 개국 초기 실질적이고 검소한 사대부의 세계관은 조선의 귀족사회가 안정되면서 솔직담백한 것에서 화려 장려한 것으로 옮겨 갔는데, 이때 이들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백자였다. 초기의 수수한 백자는 검소한 성리학의 정신을 상실하면서 세련되고 귀족화되어 갔다.
2.조선시대 자기에 나타난 문양의 종류와 그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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