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학 철학형 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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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에는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가령 수학에서는 정리를 가르치고,물리학은 사실이나 사건의 전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철학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다. 즉 이것은 철학에는 모두가 동의할만한 철학체계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철학으로부터 정확하고 확실한 지식의 총체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철학 자체를 배신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철학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기술이나 도덕은 제시해 주는가? 그러나 규칙을 제시하는 체계는 너무나 많다. 또한 철학에는 확실한 진리체계가 없기 때문에 역사가 흐르면, 체계들은 그 다음의 체계들로 이어진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이전 철학자들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박하는데 열중하고 있으면 결국은 자기 자신도 반박당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구스도르프의 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철학을 종결시키려는 것이 모든 철학의 은밀한 맹세였지만, 어떤 철학도 철학을 종결시키지 못하였다.” 이처럼 철학의 상반되는 철학의 체계로 인해 회의주의에 빠지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철학의 이론은 그 내용이나 결론 때문에 귀중한 것이 아니라, 엄정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자의 반성의 본보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다. 반대로 지식을 소유하려는 의미에서 독단론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론이 아닌 도중에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질문이 해답보다 더 본질적이다. 모든 해답은 새로운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회의론과 독단론 모두는 철학이 아닌 것이다.
1. 철학과 반성
철학하는 것은 반성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철학은 탐구이면 소유가 아니라는 말은 달리말해 철학적인 작업은 곧 반성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반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을 문제로 삼아 정신이 정신 자체로 다시 돌아가는 회귀운동을 뜻한다. 즉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철학을 제1단계의 지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제2단계의 지식, 즉 지식에 대한 지식, 앎에 대한 앎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나는 한가지 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 그 한 가지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공언하고 그 전제로부터 모든 질문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메농같은 철학자들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의 이론을 강요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솔직한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반어법 덕분에 자기 생각의 모순점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반성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소크라테스는 탁월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문제와 어려움을 밝혀내는 데 조력한 것 뿐,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반성하게 한 것이다. 이제 현시대에서의 반성의 자료는 놀랄 만큼 풍부해졌다. 이는 과학과 기술의 경이적인 발전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철학의 종류도 역사철학, 생물철학, 법철학등 많은 갈래로 뻗어가고 있다. 이는 철학이 공허한 사색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분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자료로 하는 반성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과학을 철학적으로 반성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것은 우선적으로 과학의 결과와 방법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더 깊이 들어가 과학적인 지식의 본직은 무엇인지 과학적인 지식은 심오한 실재에 대한 파악인지에 대해 묻는다. 이러한 철학적인 방향이 인식론이고, 인식론은 오늘날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다.
형이상학: 이처럼 철학은 과학을 통해 과학이 알지 못하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가령 라이프니쯔의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 이 존재하는가?”라는 아주 일반적인 문제임에도 과학이 제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즉 과학은 이러한 명백한 자료를 문제로 삼지 않고 전제로 삼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는 형이상학만이 가질 수 있는 재료이다. 즉 문제의 설정자체가 과학을 넘어서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대표적인 문제는 인간은 어디로부터 오며 어디로 가는가? 의식은 세계의 최종적인 목표인가? 라는 것들이 있다.
2. 기술과 지혜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이다. 철학은 지식도 아니고, 힘도 아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지식은 과학적인 지식을 의미하게 되었고, 기술은 인간의 힘의 척도가 되었다. 이제 철학적인 지혜라는 말은 세계에 복종하고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며 불행 앞에 체념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철학 역시 이러한 체념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가령 스피노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필연적이고 논리적이고 피할 수 없는 관계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관점에 잠시 변화가 생겨났다. 그 대표주자는 데카르트이며 그는 방법서설에서 “세계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변화시키는 것이 좋고, 운명을 정복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데카르트 역시 그의 저서 후반기에서 지혜에 의한 우주중심론을 기술에 의한 인간주의로 대치시킨다. 이제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기술을 찬양하는 철학자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철학자 디드로는 산업생산자보다도 철학자를 더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 놀란다. 이제 디드로의 이러한 사상은 이제 오늘에는 일반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과 과학의 발달은 우리에게 불안한 과제 역시 안겨주고 있다. 기술은 인간에게 행동의 방법만을 제공하면서 행동의 목적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렇기에 이제 역설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밝혀 줄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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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생각해볼만한 문제 거리)과학과 철학의 방향: 자연과학의 압도적인 업적은 철학자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자기반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이 그 고유한 탐구 영역으로 삼아 왓던 정신이 실험심리학의 발달로 자연과학화 함으로써 철학은 정체위기에 부딪히게 되었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언어학이나 심리학 등의 분과학문들을 모두 경험적으로 포착되는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은 탐구 대상으로 하는 1차학문 이라고 한다면, 철학은 이들 1차학문들의 논리적 개념적 체계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2차학문 이여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학과 철학이 굳이 하나가 되어야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지만 서로 상호보완적인 측면은 충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 철학은 과학이 질문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찌기 과학혁명시대에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분석 등이 이 세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의미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재정립하게 했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그리고 최근의 현대 물리학및 우주론등의 전개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이세상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주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뉴튼의 절대시공간 개념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시공간 개념으로 대치된 후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 인가?" 라는 인류의 오랜 의문에 대해서조차 현대물리학은 아직 확실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앞서서 말했듯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론을 벗어나 관찰자와의 관계 등 새로운 시각에서 시간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것은 철학자들이 아닌가? 특히 최근의 우주론등 현대물리학은 인간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직관과 엄청나게 상반되는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물리학 최전선의 연구에 의하면 자연에는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거리, 시간 및 공간개념이 모두 해체되는 궁극적인 영역이 존재한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기존의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 및 어쩌면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는 본질적으로는 물리적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관점이 대두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물리학자들은 자연의 인식에 관해 엄청난 혼돈을 겪고 있으며 철학적 사유의 필요성에대해 공감하게 되어 갈수록 현대물리학과 철학은 서로의 영역을 허물고 있다. 과학이 진보할수록 명확한 사실보다 모호한 사실이 더 많아지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사고가 궁극적으로 이세상의 본질에 접근하기위해선 아직도 많은 험난한 여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자연의 본질탐구에 대한 이 인류의 끝없는 여정에서 철학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과학과 서로 상호보완적인 진리의 도구로서 앞으로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3. 철학적 반성과 인생
철학적 반성은 인생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인간은 참으로 자기 인생의 주인인가? 우리는 완전히 소멸해 버리고 마는가? 이 문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문제이다. 만일 철학적 반성의 대상이 세상을 알고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철학적 반성은 이 세계와 어는 정도 물러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적인 금욕에는 실재로부터 단절될 위험성은 없는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동굴의 비유:플라톤은 앞서 말한 문제에 대해서 철학을 변호한다. 그는 만일 철학자가 세상과 단절된 어리석은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야유를 받는다면 그것은 아주 적절한 야유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세계, 일상경험의 세계, 변하는 사건의 세계는 표면적인 세계이고 이것은 환상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자는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다운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 철학자들이 살고 있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 철학자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예로 들자면, 인간은 동굴 속에서 묶여있는 죄수와 같다. 그러기에 그는 동굴에 비친 그림자가 참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그는 그것이 그림자인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다시 죄수가 동굴에 들어간다면 그는 어두움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 죄수들이 실재라고 믿고 있는 움직이는 그림자를 잘 보지 못할 것이다. 철학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다시 말해 플라톤은 물질적인 현실에 대하여 무지하고 실제 생활에 있어서 무능한 철학자를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유일하고 참된 세계인 이데아들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철학자에게는 감각적인 세계를 경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러한 개념에는 반박의 여지가 있다. 플라톤의 세계에 대한 경멸을 그의 편견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실천적인 사람과 철학자를 노예와 자유인을 대립시키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즉 노예는 실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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