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구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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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구양수는 중국 북송(北宋)의 시인이면서 사학자·정치가이다. 호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자는 영숙(永叔),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강서성(江西省) 길안시인 길주 여릉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구양수는 쓰촨 성 몐양의 지방관이었던 아버지 구양관(歐陽觀)을 4세에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후베이[湖北]에 살고 있던 숙부 구양엽(歐陽曄)의 집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랐다. 집안이 너무나 가난해서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인지 모르지만 집안이 궁색한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1030년 진사(進士)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서쪽의 수도였던 뤄양[洛陽]의 유수추관(留守推官)을 제수 받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인으로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던 구양수는 뤄양에서 유명한 시인 매요신(梅堯臣) 등과 사귀었다. 이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구양수의 문학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이를 계기로 고문의 간결성·명료성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 구양수는 몇 해 전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의 작품을 읽고 케케묵은 은유와 고전문구의 인용을 일절 배제한, 평이 하고 간결한 고문체에 크게 감명 받았다. 이후 고문체 부흥의 지지자·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새로운 문학운동의 전기를 마련했다.
1034년 수도 카이펑[開封]에 있는 황실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었다. 2년 뒤 고위관리인 범중엄(范仲淹)이 조정의 제도와 정책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재상(宰相) 여이간(呂夷簡)에 의해 좌천되었을 때 구양수는 서슴지 않고 여이간을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결과 그도 후베이 성, 후난 성[湖南省]의 하급관리직으로 강등·좌천되었다. 이곳에서 거의 1,000년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오대사기 五代史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엄격하고 공정한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정치적 소외세력인 순교자·반란자·매국노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그 전대(前代)의 역사가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수도 카이펑으로 다시 돌아온 범중엄과 다른 고관들의 추천을 받은 구양수는 1043년에 카이펑으로 소환되어 지간원정(知諫院正)이 되었다. 범중엄과 기타 정치개혁가들이 사사로운 파당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자 구양수는 유명한 〈붕당론 朋黨論〉을 써서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모임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용기와 직언에 감복한 인종(仁宗)은 구양수를 황제의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조칙(詔勅)의 초안을 작성하는 직책에 임명했다. 그는 직언과 엄정한 비평 때문에 적이 많았는데 1045년에는 여러 해 전에 조카딸과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탄핵을 받아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가 뤄양 시절에 여자관계가 문란했던 점을 미루어볼 때 이 탄핵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비록 무죄로 방면이 되기는 했지만 그의 명성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구양수는 다시 강등되어 안후이 성[安徽省]의 추저우[州] 지사(知事)로 좌천되었으나 이 고장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매혹되어 더욱 술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스스로 호를 취옹(醉翁)이라 지은 뒤, 취옹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취옹정기〉라는 수필을 썼다. 이 글은 중국문학에서 가장 이름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1050년 남쪽 수도인 허난 성 구이더[貴德]의 자사(刺史)를 거쳐 1054년에는 수도로 소환되어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가 되었다.
좌천된 지 거의 9년 만에 수도로 돌아와서 맡게 된 이 새로운 보직은 승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강직함과 직설적인 태도 때문에 동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신당서 新唐書〉를 저술하는 것이었다. 1년 뒤 이 작업이 막 시작되던 때 구양수는 중국 북부의 대부분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만주 거란족에 송의 사절로 파견되었다. 1057년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해의 과거시험에서 고문체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들은 합격시키는 한편, 문학적 수사를 많이 사용하는 태학체(太學體)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은 모두 불합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합격된 사람들 가운데는 후에 당송 8대가로 칭송되는 소식(蘇軾:蘇東坡)·소철(蘇轍) 형제와 증공(曾鞏)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 자신의 문학관을 전통적인 과거시험에 적용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낙방 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변려문(騈儷文)보다 고문(古文)을 더 중시하는 결정적이고 획기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중국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과 소식 같은 유능한 젊은 문인들을 칭찬하고 독려했다.
〈신당서〉가 완성된 1060년 그는 사회·재정·군사 등의 각 분야에서 많은 공적을 남기면서, 군정(軍政)을 담당하는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했고 그다음 해에는 부재상(副宰相)에 해당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더 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하여 60세에 그의 관운(官運)은 끝이 났다. 그는 며느리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명성에 타격을 받아 수도에서 점점 더 고립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거듭하여 퇴관시켜줄 것을 건의했으나 새로 등극한 신종(神宗)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안후이·산둥·허난 등지의 지방관으로 내보냈다.
산둥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그는 전에 자신이 키워 준 왕안석이 제정한 신법(新法) 가운데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는 청묘법(靑苗法)에 특히 반대하여, 그의 관할 지역에서 그 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분명 신법의 시행에 실망을 느낀 보수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1071년 그는 태자소사(太子小師)가 되어 은퇴했다. 그는 취옹정이 있는 아름다운 안후이성의 영주(潁州:지금의 푸양 현[阜陽縣])에서 은퇴 후의 생활을 보낼 작정이었으나 그곳에서 몇 달 살지 못하고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구양수의 개인적 영향력과 여러 방면에 걸친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정치가로서는 유교원리를 통해 당시의 정계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추천했다. 추천받은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그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있었다. 구양수는 일찍이 한유의 작품에 심취하여 한유의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지지했으나, 한유보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그는 맹자의 글처럼 간결명료한 한유의 고문체 문장을 좋아하여 당시 유행하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운율을 맞춘 태학체 문장을 멀리하고 고문체 문장을 즐겨 썼다. 고문체로 쓰여 진 그의 문장은 이후 많은 문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는 산문시인 부(賦)의 형태를 여러 가지 제약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했고, 부와 사(詞)를 비롯한 다른 문학형태에서 모범이 되는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대사기〉와 〈신당서〉에서는 전통 역사서의 형태와 범위를 확충했고 간결하지만 정확한 기술과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그 당시의 인물과 제도를 평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의식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학자로서는 후대의 주석들을 무시하고 원전(原典)을 새롭게,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고고학연구에도 일조했고, 화가로서는 새로운 문인화(文人畵)화법을 창안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역사서 이외에도 시·정부문서·편지, 기타 소품들을 합쳐 150권이 넘는다. 그의 서재는 1만 권이 넘는 책과 고대로부터의 문학적 유품 및 고고학적 기록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李知玹 옮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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