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해 청나라의 정치문화사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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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되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女眞 또는 女直이라고 불리었다. 그 일부가 12세기에 화북으로 진출하여 금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海西建州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 통치를 받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建州佐衛 도독이었던 猛哥帖木兒의 후손으로 성은 愛新覺羅였다. 그는 명에 대해 七大恨을 포고하고 공공연히 도전을 하였다. 우선 만주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滿洲 고유의 八旗制度를 만들었으며, 八部의 具勒(旗主,관리자)으로 하여금 공동으로 정치를 의논하게 하였다. 또한 만력27년(1599)에 몽골 문자를 가지고 만주어의 음을 표시하는 만주 文字를 창제 하였는데 이를 老滿文이라 하며 女眞족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 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建州佐衛의 首長 누르하치가 女眞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大金이라 하고 연호를 天命이라 하였다. 이 大金을 이전의 金과 구별하기 위해서 後金이라 부른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한편 사르후(薩爾滸)에서 명군을 크게 물리치고 요동평야로 진출하여 遼陽을 도읍으로 정하였고 이어 瀋陽으로 천도하고 盛京으로 개칭하였다.
2) 皇太極의 繼位와 국호의 改稱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나자 막내로서 여덟째 아들인 黃太極(Hong Taiji)이 繼位하여 ‘칸(汗)’이라 칭하고 연호를 天聰이라 하였다. 당시 후금과 접해 있는 조선이 친명정책을 펴고 있어 후금이 中國으로 진출하는데 큰 장애 요인이 되었다. 이에 皇太極은 1627년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정복하게 하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그리고 몽골의 林丹汗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漠南지역을 모두 지배하게 되었으며 明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皇太極은 관제를 정비하여 나머지 형제 貝勒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칸의 권력을 강화 시켰고 즉위 이래로 10년동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漠南을 점령한 다음 1635년에는 여러 貝勒의 추대 형식을 빌어 황제로 부르게 되었다. 이 때부터 명 황제와 동급으로 더 이상 변방의 국가가 아님을 과시하였으며, 족명도 女眞이라 부르지 않고 滿洲人이라 칭하였다. 이는 동시에 전통의 부족제가 무너지고 칸의 지위가 다른 부족장 위에 서는, 전제군주체제로의 일보를 내딛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듬해 국호를 後金에서 淸이라 고쳐 불렀으며 연호도 崇德으로 고쳐 심양을 도읍으로 정하여 盛京이라 했는데 그가 바로 청태종이다. 한족 지식인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였으며 과거를 실시하여 한족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老滿文을 바탕으로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新滿文을 만들어 그 후 역대에서 사용하였다. 몽고와 서장과의 연락,지배 수단으로 라마교를 전파시켜 이용하기도 하였다. 兵源을 확대하여 명과 작전하고 滿軍八旗와 蒙古八旗를 조직하였으며, 皇太極은 명과 화의를 하면서 시간을 벌어 우선 군량을 얻고 또한 조선과 명과의 왕래를 끊어 모문룡의 군대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정벌하였다(1636).
3) 청군의 입관
皇太極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福臨(6歲)이 계위하고 順治라 改元하였으며 多爾袞과 제이합량이 보정하였다. 이후 攝政王 多爾袞(Dorgon, 1612~61)의 도움을 받아 紫禁城의 주인이 된다. 도르곤의 원정 당시 명 내부는 붕괴하여 이자성의 난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명은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명의 장군 吳三桂에게 급히 북경으로 돌아와 이자성을 막도록 하였으나 吳三桂는 황제가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山海關을 들어가 형세를 관망하다 청군에 항복을 하게 되고 청은 吳三桂와 함께 북경을 점령하고 있던 李自成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順治帝는 북경 無血入城이라는 행운을 잡았던 것이다.
順治帝는 그해 9월 성경을 떠나 북경으로 들러가 10월 1일 제위에 올라 북경을 도읍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明의 숭정제의 장례를 치르고, 명의 관리로 항복한 사람을 승진을 시켜 그대로 일을 맡도록 하였으며, 세금도 정식 항목 이외의 일체의 부가세를 면제하는 한편, 의관과 예속도 명대의 것을 그대로 유지시켜 민심을 안정시켰다.
참고문헌
7.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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