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대만 정치관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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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동북아 국가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중국과 대만의 문제는 동북아 군사안보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문제이다. 중국과 대만 간의 분쟁은 1946년 7월부터 전면적 내전에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는 분쟁이다. 양측 간의 무력충돌은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뿐만 아니라, 미·중관계의 경색은 한국을 포함한 역내 국가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한반도 안정과 통일을 어렵게 만드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중국과 대만간의 군사적 대립은 현재 한·미·일 對 중국이라는 동북아의 전략적 구도를 가시화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입장에서는 전략적, 경제적, 지역적 영향을 모두 받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앞으로 다룰 전반의 내용은 중국과 대만간의 ‘무력충돌’ 가능성이 높다고 가정하고, 중국의 대외정책, 대만의 독립, 미국의 입장 등을 ‘무력충돌’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중국과 대만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 중국과 미국의 교류 등을 놓고 봤을 때 전쟁의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만의 독립선언’ 과 ‘본토의 정치적 소요상황’ 이 두 가지가 나타난다면, 중국과 대만의 무력충돌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이 중국과 미국의 무력충돌로 이어진다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는 세계 최대의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 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 대만의 분쟁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살펴보고, 중국의 외교정책과 미국의 입장을 중심으로 향후 관계를 전망해보고자 한다.
Ⅱ. 양안관계의 전개과정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간의 체제경쟁은 1911년 청조를 붕괴시킨 신해혁명 계승자로서의 중화민국(1911-1949년간 중국대륙의 일부를 통치, 1949년 이후 대만으로 이전)/국민당과 1949년 중국대륙을 통일한 중화인민공화국 / 공산당간의 체제 정통성 문제 및 정치, 경제, 외교, 이념, 군사를 포함하는 전 분야에 걸친대립이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의 창당 이후 양측은 1924년 1월 군벌을 토벌하기 위한 제1차 국공합작,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점령 및 1937년 7월 일본군의 중국대륙 전면 침공에 대처하기 위한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이후 대륙 각지에서 양측 간 교전이 발생하였고, 특히 1946년 7월부터는 전면적 내전에 돌입하였다. 중국에서는 1945년 8월부터 1949년 9월까지 국민당과의 내전기간을 "해방 전 시기"로 분류하는데, 일본의 항복 당시 공산당원 수는 120만 명, "홍군"(공산당군)의 수는 90만 명 이상이었고, 1947년 말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국민당군은 약 270만, 공산당군은 120만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승세를 굳히고 있던 공산당군의 수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동 기간 전투 중 가장 치열한 격전은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 전개된 沈陽, 淮海, 北平(北京)-天津戰鬪로서, 특히 회해전투는 3개 전투 중 유일하게 국민당군의 수(약 80만)가 공산당군의 수(약 60만) 보다 우세하였으나 약 5개월에 걸친 교전 끝에 약 15만의 국민당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내전 기간 중 양측 및 민간인 사망자는 수백만이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및 국민당의 대만으로의 정부 천도 이후에도 양측은 각각 무력으로 "대만해방" 및 "본토수복"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는데,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한 미 7함대의 대만해협에 대한 개입·봉쇄로 인해 대규모 공격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1954-55년, 1958년 8월 金門島, 馬祖島에 대한 포격, 그리고 대만은 1960년대까지 중국본토 인근 성에 대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는데, 양측 간의 교전이 아닌 일방적인 교전의지 과시, 혹은 특수임무의 수행이 주목적이었다. 한국국방연구원 세계분쟁(World Warwatch)의『중국-대만분쟁』에서 인용 <http://www.kida.re.kr/woww/> (검색일 ; 2005년 5월 10일)
1971년 11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가 대만에서 중국으로 이전됨에 따라, 대만은 외교적 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후 양측은 국제외교무대에서의 정통성 및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경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양측 간 평화적 통일제안은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추진 이후 제기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은 "一國兩制"(1국가, 2개 체제), 대만은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는 통일방안을 요구하고 있어 해결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 특히, 대만 내에는 85%이상이 대만출신이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 및 "대만화" 추세가 증가하고 있으나, 대만의 독립 시 무력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중국의 입장과 상충되어 양측 간 매우 민감한 문제로 남아있다. 1995년 7월, 1996년 3월(대만 최초의 총통 직선전)에 발생한 중국의 대만해역 미사일 발사훈련은 대만의 독립화 경향을 사전에 봉쇄하겠다는 중국의 의도를 반영한 사건이다. 중국·대만문제의 해결에는 미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미국은 대만과의 동맹관계를 단절하였으나, 대만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국내법인 "대만관계법"을 1979년 4월 제정하였다. 2000년 3월, 대만 총통선거에서 야당인 민진당의 첸수이비엔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양안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였다. 첸수이비엔이 대만 독립을 지향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려는데 반해, 중국은 대만과의 관계 개선은 대만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먼저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중국은 평화적 통일을 원하지만 대만이 독립을 선포하게 될 경우 군사행동도 불사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최근 들어 양안관계는 중국의 주권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상호 유익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여 다소 완화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대만이 각기 경쟁적으로 무기체계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력 충돌 상황도 배제할 수는 없다.
2002년7월1일대만부총통, `일국양제 수용불가를 재천명하였다.뤼슈렌(呂秀蓮) 대만 부총통은 홍콩의 중국 주권 회귀 5주년을 맞은 1일 ‘하나의 중국, 두 체제’라는 이른바 ‘홍콩 모델’을 수용하라는 중국당국의 반복되는 제안을 거듭해 거부했다.대중국 강경파로 분류되는 뤼 부총통은 지난 97년 중국으로 주권이반환된 후 홍콩의 실업률이 사상 최고인 7% 이상으로 치솟는 등 홍콩 경제가 침체에 빠졌다면서 대만은 ‘홍콩 모델’을 채택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하튼 양안관계는 최초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체제 정통성 문제 및 정치, 경제, 외교, 이념, 군사를 포함하는 전 분야에 걸친대립이었다가 점차 독립과 통일의 갈등관계로 전환되었음을 볼 수 있다.
Ⅲ. 중국의 외교정책
1. 중국 대외정책의 성격
참고문헌
<참고자료>
● 중국학 총서 26, 한인희 『中國外交史(중국외교사) ·1979~1994·』 和永社, 2000.
● 쏭챵외 4인 공저,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동방미디어, 1997.
● 자오찬성, 『중국의 외교정책: 미시-거시 연계접근분석』 도서출판 오름, 2001.
● 와다 하루키, 『신지역주의 선언 :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주)일조각, 2004.
● 최장집 외 , 『정치적 현실주의의 역사와 이론 : 제 6장 중국의 정치적 현실주의와 대외정책』 우암 평화 연구원, 화평사, 2003
● 웹사이트, “World Warwatch 한국국방연구원 세계분쟁
● 문흥호, 『13억인의 미래』, 당대총서,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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