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과신 군부세력의 관계 반미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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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두환, 레이건, 나카소네가 각각 집권한 한미일 3국은 보수노선을 강화했다. 또한 이란,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에서의 외교적 실패는 카터행정부의 제3세계 ‘인권외교’를 파탄으로 몰아넣었고,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보수화의 물결이 드세어졌다.
미국은 이란혁명니카라과 혁명 1979년 7월 중앙아메리카 니카라과에서 소모사 족벌독재체제 타도와 민족의 자립적 발전을 목표로 하여 일어난 혁명. 니카라과에서는 1936년 국가경비대 장관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가 자유당의 사카사 정권을 쿠데타로 추방한 이래, 소모사 일족의 독재지배가 계속되고 있었다. 독재체제하에서 국민대중의 극도의 빈곤과 더불어, 소모사 일족이 독재권력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꾀하였기 때문에 비소모사계 부르주아의 불만도 심하였다. 반소모사 투쟁은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을 주축으로 진행되었다. 국민의 총봉기를 앞둔 79년 7월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FSLN이 수도 마나과에 입성, 혁명은 성공하였다.
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등으로 조성된 국제정세 변화와 자국의 심각한 인플레이션 등에 의한 팍스아메리카나 체제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 군비확장, 우방국과의 군사적 동맹 강화, 제3세계에 대한 적극적 개입 등을 통한 대소 강경노선을 추구했다. 이러한 레이건의 ‘힘에 의한 평화’노선에 따라 동북아는 반소블록으로서의 한미일 3각 군사동맹이 점차 가시화되어 긴장이 격화되어 갔다.
미국은 동북아에서의 반소 블록을 강화하기 위하여 1983년 한국은 ‘중요한 이해지역’에서 ‘사활적 이해지역’(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핵전쟁을 불사하고라도 수호해야할 지역)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일본의 재무장을 지원하고 한일간의 군사 교류와 협력을 촉진시켰다. 일본 역시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북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려는 야심 속에 군국주의 노선을 부활해 갔다. 이에 따라 한미-미일간의 군사 동맹체제가 미국을 중심으로 긴밀하게 연동되고 일본이 한국에게 대규모의 ‘안보경협’을 지원하면서,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이 강화되어 갔다.
미국의 광주진압 묵인승인
광주민중항쟁은 거시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략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견이 1980년 전후 미국과 한국 정치세력의 ‘대안’이 오직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군부 파시즘의 재구축만으로 시종일관 상정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민선민간 정부의 권력 이양’안과 위의 방안 둘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그 같은 동요가 미국의 지배 세력 내부(백악관과 국무성, 국방성과 주한 미 당국 및 CIA)에서 일단락되고 전자의 대안이 확정적으로 선택된 것은 대체서 1980년 2월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한국 내에서도 군부와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주도하에 쿠데타를 위한 치밀한 시나리오 수집과 막후 공작히 활성화된 것은 2월말경의 시점이었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 세력이 10.26 직후에는 전자를 좀 더 우세하게 고려하였으나, 결국 전자를 선택하기로 최종적인 결론을 얻는 데는 무엇보다도 당시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던 김대중에게 권력을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영희 교수 증언, 1990. 5. 31)
10.26사태 이후 한국의 상황이 급속히 안정되기를 바란 미행정부는 신군부의 12.12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그리고 미국은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하자 20일 경에는 항쟁의 진압을 위한 20사단 투입 요청을 승인하는 한편, 동북아시아의 안정 및 한반도의 안정을 직결시키면서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나타나지 않는데도 북한의 동향을 운운하며, 22일에는 항공모함 코럴시호, E-3 조기 경보기 등을 급파하여 신군부의 움직임에 동조하였다.그리고 최종적으로 5월 23일의 백악관 고위 정책 조정 회의에서의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걸린 한국에서 군부를 약화시키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신군부 파시스트의 반동적 공세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의 진압과 신군부 파시스트 체제의 등장이 한미 지배 권력의 합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일본 정치세력의 이해 또한 작용하고 있었다. 즉, 1980년을 전후한 당시 미국의 대한 정책의 시험대였던 주한 미군 철수 정책이 후퇴한 데에는 미국의 군산 복합체의 이해와 압력이 기본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일본의 중의원과 참의원 191명의 서명 건의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광주 대학살 이후 일본 정부는 마에다 대사, 자민당 간사장인 군국주의자 기시 노부스케를 파견하여 전두환에게 “진압을 잘했다, 군부 정권을 지지하겠다”고 축하, 확약했다. 이처럼 한미일 3각의 지배 질서 구축에 맞서 자연 발생적으로 광주 민주화 항쟁은 폭발적인 대중 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시작되었다.
전두환정권에 대한지지
레이건은 취임 후 첫 번째 정상외교로 전두환을 초청하여 주한미군 철수 백지화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카터의 ‘인권외교’와는 달리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노골적인 지원의지를 밝힌 레이건은 1983년 한국을 방문해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또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직접 휴전선 시찰에 나서는 등 한국에 대한 방위 공약을 확고히 했다. 이는 “제3세계의 어떤 독재라도 반미 내지 공상독재보다는 낫다”는 이른바 커크 패트릭 독트린에 입각한 레이건 집권 초기의 일관된 제3세계 정책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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