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사에서 중요한 감독과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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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르네클레르의 본명은 르네 쇼메트 Rene Chomette이며, 1898년 파리에서 태어나 1981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청년 시절 그는 수려한 외모 덕택에 영화 세계에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고 푀이야드의 <삿갓풀 Parisette> 같은 영화에 조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는 패션 잡지의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기도 한다. 1923년 클레르는 <잠자는 파리 Paris qui dort>라는 작품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하는데, 이 작품은 마치 한편의 스케치와 같은 독특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4년에 그가 두 번째로 감독한 영화 <막간극 Entracte>은 평단으로부터 “영화에서의 <위뷔 왕 Ubu Roi>"이라는 격찬을 받으며, 특히 다다적인 유머와 신기루 같은 영상의 매력으로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둔다. 그후 클레르는 활발한 연출활동을 벌이며 프랑스의 무성영화를 이끄는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리잡는다. 그의 세 번째 작품인 <상상여행 Le Voyage imaginaire>(1925)은 멜리에스의 영화를 그대로 모방한 보잘 것 없는 패스티슈에 불과해 관객들을 실망시켰지만, 뒤이어 발표한 두 편의 영화 <이탈리아의 밀짚모자 Un chapeau de paille dltalie>(1927)와 <소심한 두 여인 Les Deux timides>(1928)은 극작가 외젠 라비슈 Eugene Labiche의 희곡들을 각색한 것으로 다시 한번 그의 영화적 재능을 확인시켜주었다. 또, 그가 감독한 마지막 무성영화인 <탑 La Tour>(1928) 역시 그 무한한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작품들이었다. 클레르는 자신의 무성 영화들에서 황당하게 엇갈리는 결혼이나 dntmRHkdtmfjdns 재판 등 일상적 소재를 코믹하게 비틀어 표현하는 작업에 특별한 흥미를 느꼈으며, 때문에 항상 자신을 채플린에 견주곤 했었다.
덧붙여, 클레르는 시네아스트이면서 동시에 작가이자 연극인이었다. 그는 산문집으로 <아당 Adams>,<중국인 공주 La Princesse de Chine>,<조금씩 De fil en aiguille>등을 남겼고, <우연의 유희 Jeux du hasard>라는 중편 소설을 발표했다. 또, 희극작품인 <부드러운 입술을 가진 창녀 La Catin aux levres douces>라는 희곡을 완성한 바 있으며, 파리 오페라에서
연출을 맡기도 했다.
(2)이미지와 음향에 대한 경쾌한 변주
클레르의 영화들ㄹ은 인간의 본질을 깊이 있게 다루거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항상 경쾌하고 재미있는 스케치 같은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꾸밈이 많지만 순간순간 매력이 넘치는 줄거리와 또 항상 소란스럽지만 일상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하는 친근한 등장인물들로 이루어졌다. 무성영화 시절, 클레르의 연출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파급 효과보다는 배경이 되는 장소의 아름다운 경치와 음악의 호소력에 더 의지했다. 즉, 진정한 창조적 정신을 추구하기보다는, 투명하고 반짝이는 재치를 표현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둔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을 바탕으로, 클레르는 <잠자는 파리>나 <막간극>같은 영화들을 통해 이미지들을 끼워 맞추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인 것을 표현해내는 기법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클레르는 영상과 음향의 처리에 대한 남다른 재능에도 불구하고 작품들 전체가 고른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특히, 그의 후반기 작품들의 몰락은 무성영화 시대에 그가 실천한 선구적 작업들의 가치마저도 격하시킬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그동안 클레르의 영화세계가 지나치게 격찬을 받아왔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며, 많은 이들은 그의 영화들이 기교적으로는 훌륭했지만 서사구조와 주제의 표현에는 매우 빈약했다는데 공통된 의견을 보이고 있다. 클레르는 독자적으로 혹은 공동 작업의 형식으로 자신의 거의 모든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맡았는데, 이것이 어쩌면 그의 영화의 취약한 서사구조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2.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
(1) 1기 : 누벨바그 시기
* 주요작품 : <네 멋대로 해라(1960)>, <작은 병정(1960)>,<여자는 여자다(1961)>,<기관총부대(1963)>,<경멸(1963)>,<미치광이 피에로(1965)>,<알파빌(1965)>,<남성/여성(1966)>,<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가지 것들(1966)>,<중국 여인 (1967)>,<주말(1967)>,<미치광이 피에로(1965)>
(2) 2기 : 68년 5월 이후, 지가 베르토프 시기
지가 베르토프(’기록영화‘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30년대 소련 영화감독)시기..
<즐거운 지식(1968)>부터 <만사형통(1972)>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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