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여행 기행문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6.27 / 2015.06.27
  • 4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방학이 시작 되자마자 학기 중 너무나 생각해 왔던 北京 여행을 떠올리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18일을 출발당일로 결정했다. 출발당일, 설레는 맘을 품고 우리는 荊州에서 바로 무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中國에서 처음 시도해 보는 中國 여행이라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공항까지는 약 4시간 정도, 공항에 도착해 여러 가지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기까지엔 그리 짧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한 시간 정도의 기다림과 비행기의 연착으로 약간의 지루함이 설렘을 더 倍加해 주었다. 비행기의 이착륙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北京으로의 발을 내딛었다, 공항을 나옴과 동시에 차가운 바람과 택시와 차량의 騷音이 날 맞아주었다.
택시에 올라 우리가 예정했던 숙소로 향해 달렸다, 대도시라 그런지 밤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량과 높고 커다란 건물들이 우리의 눈을 바쁘게 만들었다, 친구의 소개로 도착한곳은 北京 首都 師範 大學校, 하지만 친구들이 不在中이라 학교 학생이 아니면 학교 소재인 호텔에서 숙박할 수 없다는 말에 우리는 다음날 예약했던 개인 旅行社분의 自宅에서 머물게 되었다, 친절한 사장님의 말씀에 맘이 놓였고. 우리는 약속장소에 도달했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직접 차로 마중 나와 주신다고 하는 마음씀씀이가 海外에서도 韓國人의 人心은 찬바람에 식어버린 우리의 몸과 맘을 녹여주었다.
숙소 도착 후, 旅毒을 풀 틈도 없이 뱃속의 아우성이 우리를 맛있는 한국음식으로 이끌어 버렸다. 中國에서 먹는 한국음식의 맛이란, 몇 개월을 한국음식과 이별했던 우리에겐 너무나도 커다란 감동이었다. 사장님과 함께 가벼운 소주한잔으로 그날의 하루를 포근한 잠자리로 마무리했다.
둘째 날, 아침 일찍 잠에서 일어난 우리는 사장님과 함께 萬里長城을 보기위해 햄버거로 간단한 아침을 해결하고선 여행길에 올랐다. 長成까지 도착하는 중간 중간 荊州에선 볼 수 없었던 큰 건물,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흡사 한국을 보는듯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시내를 벗어나 달리자 이곳과 마찬가지로 논과 밭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도시와 시골이 共存하는 공간이라 이상하게 생각할 수 도 있었지만, 오히려 文化遺産과 自然을, 自然과 都市를 한 번에 어우르는 것이 北京의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두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長成, 그곳을 오를 땐 한국의 옛 대관령을 연상케 하는 구부러진 길이 우릴 맞아주었다. 산 정상에 다다르자 하얀 눈 덮인 산을 만났고, 영화에서 보던 하얀 구름이 넘실대던 산등성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케이블카를 타기위해 우리는 열심히 산을 올랐고, 케이블카를 타자마자 아래에서 보았던 광경이 내눈 아래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구름들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멋진 환경이 펼쳐지자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고, 우리는 한껏 분위기에 심취할 때 쯤 케이블카가 정상에 도달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長成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빛의 벽돌로 차곡차곡 쌓여진 長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눈으로 끝을 알 수 없는 長成에게서 커다란 힘이 느껴졌다. ‘人類 最大의 土木工事’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中國 역대 왕조들이 北方民族의 侵入을 막기 위해서 세운 防禦用 城壁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에 이른다고 알고 나서 바라보는 視線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서쪽보다는 동쪽이 堅固하게 築城되어 있다. 2천년의 세월동안 中國 역대 왕조들이 萬里長城을 쌓은 가장 중요한 目的은 北方民族의 侵入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왕조의 성격에 따라 萬里長城의 중요성이나 萬里長城에 쏟는 정성도 달라졌다. 왕조가 攻擊적이었던 시기보다는 防禦적이었던 시대에 萬里長城은 더욱 중시되었다. 또한 기계의 힘없이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築造했다는 사실이 더욱더 믿기지 않았다, 그 크기에 한번 놀라고 사람의 위대함에 한 번 더 놀랐다. 감탄을 뒤로하고 우린 다음 目的地인 13 릉 으로 향했다, 명13릉의 입구에는 아무것도 써놓지 않은 碑石이 하나있는데 無慈悲라고 한다. 前皇帝인 만려황제가 아무런 公的을 세우지 않아 碑石에 아무것도 써놓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방면으로 보면 자기를 위해 평생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에 난 멋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명13릉은 南京의 孝陵과 함께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3릉 앞에서 사진을 찍은 후, 약 1시간 정도를 더 달려서 龍慶峽에 도착했다, 사장님의 말로는 北京에 와서 龍慶峽을 와보지 않으면 구경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가 있다고 했다.
주차장에 도착해 우리는 입장권과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전기 자동차의 표를 끊고 전기 자동차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겨울 初入인데도 북쪽이라 칼바람이 불어와 매섭게 우리들의 얼굴을 스쳐갔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라 정상까지 도달하는 10여분 동안 해가 져버려 氷登第의 初入에서 화려한 조명들의 洗禮를 받을 수 있었다. 입구에서 대략 안을 봤을 때 그다지 크지 않은 規模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造形物과 얼음조각 그리고 산위로 보이는 반짝이는 전구들을 보면서 작지 않구나 역시 대단한 나라 中國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彫刻像들 뒤로는 홍콩과 中國이 合作해서 만들었다는 높이 70M의 댐이 보였다. 우리는 신기한 얼음 세상에 온 듯 아이들처럼 뛰어다녔고, 얼음 彫刻像에 매달려도 보고 얼음 미끄럼틀도 여러 번 탔다. 彫刻像을 전부 다 둘러보는 데에는 한 시간 정도가 걸렸고 주차장으로 돌아 왔을 때는 이미 저녁시간을 한참 지나 있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였지만 마음만은 가볍게 집으로 향해올 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和園과 天安門 그리고 저녁에 王府井을 가기로 전날 계획을 세워놓고, 아침이 되자 일찍 준비를 하고 버스와 지하철로 이동해 和園에 먼저 도착을 했다. 學生證을 가져가지 않아서 할인이 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값으로 입장권을 구매해 입장할 수 있었다. 和園은 北京 서북부의 해정구에 위치한 정원 公園이자 궁전이다. 주로 60m 높이의 萬壽山과 池에 많은 공을 들여서 공사를 하였다. 和園의 면적은 2.9평방킬로미터 이고 이중에 3/4 이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池는 2.2 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하며,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고 파낸 흙은 萬壽山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7만 평방미터의 공간에 궁과 정원 그리고 고전적인 건축을 살려낸 것이 특징이다. 萬壽山으로 바뀌기 이전의 이름은 淸誼院 이라고 불렀다 한다. 則天武后 西太后의 별장이라 칭해진다고 했다. 軍事訓鍊을 빌미로 문을 걸어 잠그고 和園 보수만 7번을 했다고 한다. 호수를 사람을 동원해서 팠고 그 흙으로 인공 산을 만들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고 대단한 中國 사람들이라고 계속해서 느끼는 나였다. 안으로 들어가 큰 호수를 보면서 정말 인공호수이며 사람 손으로 팠다는 사실이 보고 있으면 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겠지만 그 뒤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뒷받침 되었다 생각하니 씁쓸함이 함께 교차되었다. 그리고 西太后가 고민이 있을 때 마다, 國史 政策을 펼칠 때 마다 和園의 복도 천장에 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걸었다고 한다, 그 그림의 숫자는 무려 14000여 점이 있고 中國 최대의 야외 美術館 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땐 겨울이여서 호수가 얼어 있었고 호수 위를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 커다란 호수가 얼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랐다. 和園이 너무나 넓어 전부를 다 구경할 수 없었지만 중요하고 아름다운 부분은 다 볼 수 있었다. 얼어있지 않은 호수도 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면서 다음 목적지인 天安門 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天安門 광장에 도착했다. 정말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天安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대열에 껴서 天安門을 뒤로 놓고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은 후 광장을 접어둔 채 天安門을 지나 古宮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두운 문을 지나자 북적대는 소리와 함께 많은 관광객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古宮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毛澤東의 시신을 보기 위해서 얼른 앞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古宮 안으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번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古宮은 예로부터 자금성으로 불려왔고, 명나라 청나라의 황실이었다, 古宮은 동서로 750m 남북으로 960m 크기로 총 면적이 72만 평방미터에 달해, 현존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황실이다. 古宮은 두 겹의 견고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古宮외곽은 넓이 52m 깊이 6m 의 護城河에 의해 둘러 쌓여있고, 둘레 3km 높이 10m 밑변너비 8.62m 의 성벽으로 구성되었으며, 4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 남쪽의 午門 , 북쪽의 神武門 , 동쪽의 東華門 , 서쪽의 西華門 이다, 특이한 모양새와 화려한 색상으로 하여, 中國 古代建築 藝術의 傑作으로 正評이 나있다. 이처럼 특이한 구조로 전부다 구경하려면 몇 시간도 부족한 것이 古宮이다. 北京으로 여행을 와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 정말 무섭도록 큰 규모에 놀란다. 충분한 시간동안 古宮을 구경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시간이 궁금해 시계를 보려는 순간 우리들의 배꼽시계가 먼저 저녁시간이라며 시간을 알려주었다. 저녁에는 天安門 광장에서 국기 下降式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天安門 앞에 운집해 있었다. 우리도 배가 너무 고팠지만 天安門까지 왔는데 안보고 갈수 없겠다 싶어 배고픔과 추위를 무릅쓰고 구경했다. 下降式 시작 전 天安門 양쪽의 차량이 통제되고 天安門 안쪽에서 軍人들이 줄을 맞춰 2열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정숙해 졌고 시선은 한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멋진 광경에 나는 넋을 잃었고, 軍人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耳目이 집중되었다. 너무나도 절도 있는 動作과 口令에 정말 멋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中國 국기가 모두 내려오고 나서 사람들은 해산했고 交通 統制도 풀렸다. 우리는 北京에 왔으니 北京오리를 먹어봐야 하지 않겠냐며, 北京 王府井 거리에 있는 北京오리 전문점을 찾아갔다. 北京의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인문학] 고전작품의 이해-열하일기
  • 여행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를 극명하게 피력하였다. 연암은 당시 명분론(名分論)적이고 편협한, 소견이 적은 조선의 지식인과는 다른 시각에서 중국의 문화를 볼 것을 다짐했다. 성경, 산해관,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여행하면서 연암은 이용후생에 관련된 것은 빼놓지 않고 세심하게 관찰하여 기술하려고 노력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문화와 비교하여 기술해 놓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오랑캐 문화라고 무조건 멸시하고

  • [독후감]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고 감상문 및 박지원의 사상 분석
  • 북경에 갈 때 최말단의 신분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여 다녀온 후 열하일기라는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명작 기행문을 쓰게 된다. 그 후 50세에 선공감 감역 등 말직에 머물다가 의금부도사,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등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1805년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상으로 정리 하자면, 연암의 생애는 크게 3부분으로

  • 노가재 연행 일기 리포트
  • 여행기 작성 경위1712년 동지사겸 사은정사(冬至使兼 謝恩正使)이자 저자의 큰 형인 김창집이 청나라의 사신으로 연행하게 된다. 당시 사행 인원에는 사신들의 친족 중 한 명이 무관 등의 명목으로 배행(配行)할 수 있었는데, 이때 김창업이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사행(使行)에 참여했다. 노가재 연행일기는 이런 김창업이 1712년(숙종 38) 11월 3일 경성(京城)을 출발하여 12월 27일 북경(北京)도착, 다음해 3월 30일 경성(京城)으로 돌아올 때까지 매일의 사

  • 김사량을 통해 살펴본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어로 문학을 한다는 것
  • 여행하면서 탈출로를 모색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1945년 5월 9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병사후원부의 요청으로 중국에 파견된 조선인출신 학도병을 위문하러 북경으로 가는 길에 마침내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인 태항산 남장촌에 도착하였다. 8월 해방을 맞이하여 조선의용군 선발대로 장가구, 열하, 승덕 등을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해 12월 10일 서울을 방문하여 12월 13일 조선문학동맹 결성식에 참가하였고 항일기행문 를 잡지

  • 무오 연행록 감상문 리포트
  • 여행기 무오연행록』 (도서출판 박이정, 2002) 17쪽.청을 오랑캐 나라라고 생각하며 멸시하는 면을 보이면서도 청이 조선을 안남국이나 유구국과 구분하여 으뜸 조공국으로 대우한다는 것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Ⅳ. 맺음말『무오연행록』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던 것은 않지만 서유문의 하루하루를 통해 청나라와 조선의 외교 관계를 비롯하여 서로에 대한 인식과 문화 등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특히 청이 조선을 으뜸 조공국으로 대우해 주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