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발해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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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통일신라시대는 남북조시대라고도 불린다. 남조는 통일신라, 북조는 발해를 칭하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교육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등에 많이 남아있지만, 발해의 교육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중국의 역사서를 통해서 단편적인 현상을 찾거나, 당시 국제정세를 통해 추측할 뿐이다. 여기서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교육을 살펴보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 분석하겠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교육
●통일신라의 교육
=> 신라는 문무왕대에 삼국을 통일하고 신문왕 2년(682) 6월에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국학을 세우고 예부에 귀속시켜 귀족의 자제를 교육시켰다. 국학에는 경(학장) 1명이 있고 그 아래 박사(교수), 조교(조교수)와 사무관으로 대사 2명, 사 4명을 두었다. 그런데 대사라는 사무직은 진덕여왕 5년(651)에 이미 두고 있었다. 651년은 최고행정부인 품주가 집사부로 개칭됨과 동시에 창부를 분리 설치한 해이자, 사법기관인 죄리방부가 설치되고, 김춘추가 당에서 국자감을 참관하고 온 4년 후가 되던 해이다. 이로 보면 신라의 국학은 이미 김춘추의 주장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때에는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신문왕대에 와서 그 체제가 확립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 후 국학은 점점 시설이 완비되어 나가서, 성덕왕 16년 9월에는 당으로부터 공자와 10철, 그리고 72제자의 화상을 수입하여 국학에 안치하고 석전의 예를 행하여 교학의 정신적 중심으로 삼았다.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대사로부터 무위자까지의 15세로부터 30세까지였다. 수업년한은 9년을 원칙으로 하되, 저능하여 학문을 할 수 없는 자는 그 전에도 퇴학을 명하였다. 그러나 잠재력이 있으면서도 아직 미숙한 자는 비록 수업년한 9년을 넘을지라도 재학을 허락했다. 그리고 국학을 졸업한 자는 대나마, 나마(10등급, 11등급)의 직위를 주었다. 신라의 관제는 모두 17등급이다.
국학은 두 가지 교육목적이 있다. 하나는 유교의 사상을 연구 보급하는 학문적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유학의 이념에 투철한 국가관리를 기르기 위한 인재양성 목적이다. 설립 초기에는 전자의 목적에 충실하여 여러 외국의 정치, 문화 등을 연구하거나 혹은 봉건 군주의 권위과시를 위한 비문제작에 중점을 두었다. 후기에는 후자의 목적에 치중하게 되어 국학의 교육자체가 관료화되어 나갔다.
※발해의 교육
=>발해는 당(唐)과 마찬가지로 중앙에 三省六部 一台 七寺 一院 一監 一局의 관료 기구를 설치하여 백성을 통치하였다. 일원(一院)이란 문적원(文籍院)을 말하며 관리로는 감장(監長) 1명과 소감을 두었다. 일감(一監)이란 주자감을 말하며 당(唐)의 국자감과 같은 것으로 교육을 관리하는 최고의 기관이다. 주자감은 일정의 신분과 자격을 갖춘 귀족이 자식들이 입학을 하였고, 교과서는 주로 유교 경전과 각종 중국 역사 서적들이였으며 그것은 유교사상과 그에 기초한 봉건통치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기관이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는 학교를 "학당"이라고 불렀으며, "관학"과 "사학"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관학은 관방에서 경영하는 학교인 데 궁정에서 경영하는 것과 지방정부에서 경영하는 두가지의 종류가 있었다. 당시의 수도(首都)에 는 "국자학(國子學)" 혹은 "국학(國學)", "태학(太學)"등을 설치하여 최고의 학부로 삼았을 것이다. 주자감 관하에 있는 각종 유형의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봉건귀족 관료와 대지주의 자제였다. 입학자격 등급은 매우 엄격하여 평민의 자제들은 국학(國學)과 태학(太學)에 입학해서 배울 자격 이 없었다. 각 지방의 경(京), 부(府), 주(州), 현(縣)에 설립된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역시 엄격한 계 급출신과 지위의 제한이 있었다.
발해는 또한 당나라에 많은 유학생을 보냈다. “당 태화 7년(833)에 발해국 왕이 학생 해초경, 조효명, 유보준 3명을 보내어 선진 학문에 응하게 하고 먼저 보낸 학생 이거정, 주승조, 고수해 3명은 사업이 점차 이루어졌으니 예에 준하여 교대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청하여 허락하다.”([책부원구]) 이 기록을 보면 새로 학생을 보내고 먼저 보냈던 학생을 돌려보내라고 하여 허락하였고, “예에 준하여 교대시켜 본국에 돌려보내라고 청하였다”는 말을 보면 한 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해온 일로 전례가 서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밖에도 많은 발해인들이 당의 국자감에서 수학하였으며, 과거에 합격한 사례도 많다.
특이한 점으로 발해의 왕족과 귀족의 딸들이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1949년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에서 출토된 정혜공주묘지와 1980년에 화룡현 용해촌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의 비문에 의하면 "일찍이 어려서 여사의 가르침을 받고 능히 사제를 비길 수 있었다. 그는 늘 조가의 풍기를 부러워하고 사모하였으며 시서에 두터웠고 예악을 즐겼다."라고 새겨져 있다.
종합적으로 추측해보면, 발해는 당의 문화 교육, 즉 유교식 교육을 실행하였고,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고구려의 상무적인 기풍을 이어받아, 무를 숭상한 교육을 하였다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1.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1997), 한국교육사, 교육과학사
2. 이만규(2010), 다시 읽는 조선교육사, 살림터
3. 네이버 백과사전
4. 위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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