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 한국사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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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명종대의 정국은 이른바 사화기에서 붕당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써 초기의 을사사화를 계기로 확립되는 척신의 지베체제에서 후기에는 착실하게 재지적 기반을 다져온 사림세력의 점차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해가는 시기였다. 이시기의 정세는 을사사화 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윤원형과 윤원로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중종 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한다.
명종 즉위초는 인종대와 마찬가지로 대윤이 약간 정치적 우세를 지니면서 소윤을 견지고 사림파 조차 대윤을 지지하는 추세였다. 이에 소윤은 문정황후를 등에 업고 훈구대신들과 결탁해 반격을 시도 했다. 인종 즉위 당시에는 한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반전되었다. 윤원형은 명종 즉위후 곧바로 윤임 세력의 제거 작업에 착수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킨다.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일으켰다. 이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중이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항,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닥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12세밖에 안 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공하여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한편 명종은 청정(聽政)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국운영을 모색하기 위해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량이 적임자로 주목되었다. 명종이 자신을 신임하 자 그는 이감, 신사헌, 권신, 윤백헌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기 시작했다. 한 때는 자기 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축재에도 열을 올려 그의 집 앞은 항상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 심통원 등과 함 께 조선의 3흉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해서 명종은 그를 한 때 평안도 관찰사로 내쫓기도 했지만 윤원형의 극심한 권력 독점을 염려한 나머지 명종 17년1562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이 량은 한층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예조,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된 뒤에 그의 권력 남용은 극에 달했다.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 세력들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오히려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의 사림 세력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음모가 그의 조카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화를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되었다.
2)척신세력의 약화
윤원형은 이량을 제거한뒤 자신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과 혼인시켜 면종사후 자신의 지위를 보장하려 했으나 명종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으며, 또한 당시 이조판서였던 권철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자신의 권력의 배경이 되었던 문정황후의 죽음과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명종 20년(1565) 4월의 죽음은 훈구 세력의 역사무대애서 사라지고 사림세력이 새로운 정치새력으로 등장하는 16세기의 역사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훈척세력은 관권을 이용한 사적인 이익추구와 인사권의 전횡으로 민생의 파탄과 관료사외의 기강문한으로 야기시키고 있었다. 또한 당시 민간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나라 구석구석마다 도적떼가 난립하였는데 특히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은 이들 도적떼의 두령들을 끌어모아 관군을 괴롭혔고, 그 때문에 관리들은 그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렇듯 사회가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르자 자연 국방이 허술해졌고 그틈을 타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1555년70여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한때 전라도 일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이준경, 김경석, 남치훈 등이 이끄는 군사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을묘왜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민간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이에 수취체제또한 문란해져 명종 연간 많은 민란이 발생하였다. 문정왕후는 왕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어 자신의 친정동생 윤원형의 폭압적인 권력 독점과 남용을 후원하고 있었고,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히는 등해괴한 인사를 행하기도 했다.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으로 병조판서에 밀려나 승직을 박탈 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 그의 애첩 정난정과함께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3)사림의 득세
명종은 연간은 전체적으로 보면 사림파의 실세기 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명종말 선조초의 사림정치의 막을 여는 시기이기도 하다.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들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를 수 있었다.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사화(무오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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