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이 주인 된 날중요 무형문화재 제호 밀양 백중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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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에서 지내며 우리의 소리를 지켜나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가 방송 프로그램에 나왔다. 그리고 그 소녀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 뒤로 ‘백중놀이’를 하는 모습이 잠깐 나왔다. 나는 한 해 농사를 담당했던 생산의 주체들의 놀이라는 것에서 ‘백중놀이’를 보며 호기심을 느꼈다.
그 지역의 농경문화가 낳은 하나의 예술로, 향토성이 짙은 개성과 역동적인 춤사위를 글을 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백중놀이는 논농사를 지었던 곳이라면 행해졌던 놀이인데, 절기에 맞추어 세 번의 논매기를 마치고 백중 무렵에 풍년을 기원하며 놀이를 벌이는 축제였다. 백중은 음력 7월 보름날로 중원이라고도 불렀다. 농사를 짓느라 고생했던 소작인과 머슴들을 위해 지주들의 배려로 행해진 위로인 것이다. 민간어원설에서는 하얀 발뒤꿈치를 위미한다는 백종이라는 말에서 백중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음력 7월쯤 농촌에서 논매기가 끝나고 호미를 씻어둘 때 농부들의 발꿈치가 하얗게 된다는 의미에서 온 것이다. 농경생활을 그린 풍속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을 전체가 농번기에 두레농사를 지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보탠다. 두레조직은 농사일뿐만 아니라 놀이에서도 농경사회의 밑거름이 된다. 고된 농사일을 마친 머슴들의 잔치날에는 머슴이 주인이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동국여지승람』의 풍속 조에 보면 사치스러우면서도 농사일에 부지런하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바쁜 가운데서도 멋을 즐길 줄 아는 삶을 살았던 밀양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남의 곡창지대로 농경생활의 원형과 풍속이 잘 전승되었던 밀양의 백중놀이는 다른 지역과 다른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다.
밀양백중놀이는 세 마당 아홉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마당 앞놀이는 잡귀막이굿, 모정자놀이, 농신제를 볼 수 있다. 이는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중요한 행사이다. 이때 특별한 무언가가 눈에 띄는데 바로 열 두척 높이의 농신대이다. 농신대는 일 년을 상징하는 360개 삼대로 만들어져 그 위에 사계절을 상징하는 굵은 새끼줄 4가닥을 두르고 그 밑에는 가는 새끼줄 12가닥을 둘러 열두 달을 상징했다. 머리 꼭대기에는 풍년을 상징하는 수숫대를 꼽았다. 길게 뻗은 용줄에 복주머니도 묶어둔다. 농신대는 가장 중요한 소도구라고 한다. 농신대 앞에서 머슴들은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낸 것을 보았지만 그 격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철과일과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음식들로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향 대신 쑥대향을 세워 피운다는 점도 특별하다. 모정자놀이에서는 모심기와 논매기 노래를 부르면서 모심는 동작과 논매는 동작을 흉내를 낸다. 나는 그들의 춤사위에서 농경문화의 향이 물씬 묻어남을 느꼈다. 그리고 농신제가 끝나면 사람들은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며 밀볶기를 나눠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백중날 밀양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둘째 마당 본놀이는 작두말 타기,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으로 이루어진다. 농신제가 끝난 후 농사 장원으로 선정된 좌상이 작두말 타기를 한다. 좌상은 나팔을 들고 있고 삿갓을 거꾸로 쓰고 도롱이를 걸쳤다. 이때 도롱이는 양반의 도포와 같은 역할이다. 이 후 양반춤을 선보인다. 양반춤이 끝나갈 무렵에 다른 춤꾼들이 나와 갖가지 병신춤으로 양반을 희롱하며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춤사위를 보여준다. 그들의 춤에 밀려난 양반은 병신춤을 바라보다 흥에 겨워 양반이 도포를 벗고 춤판으로 나와 춤을 추는데 이것이 범부춤의 시작이다. 병신춤은 즉흥성이 뛰어난데, 상황에 따른 즉흥적인 춤동작은 일상적으로 평소 보던 춤에서 표현할 수 없는 절규가 담겨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절규의 밝음이 춤사위를 더 아름답게 보여준다. 생명력 넘치는 춤을 본 것 같다. 병신춤을 보다 흥이 난 양반들이 춘 범부춤에서는 장구를 치는 사람과 마주보며 자신들의 흥을 주고받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열 명의 춤꾼들이 보여주는 이 신명은 서민들의 양반풍자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들의 한을 풀어내는 카타르시스가 하나의 난장으로 표현이 되는 것 같다.
셋째 마당 뒤풀이는 오북춤, 화동마당을 볼 수 있다. 오복춤에는 다섯 명의 북잡이가 나오는데 풍년과 오복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하는 화동마당으로 마무리가 된다.
‘밀양백중놀이’는 밀양 아랑제에 소개되면서 그들의 백중놀이를 전국에 알리게 되었다. 밀양은 부농이 많아 양반과의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은 ‘밀양백중놀이’를 통해 양반의 풍자에서 얻은 위안으로 힘든 농사를 조금이나마 버텼던 것은 아닐까. 놀이를 행하는 부녀자들은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와 머리수건을 쓴다. 남자들도 그러하며 붉은색이나 검정색 주머니와 농사일을 할 때 썼던 고동을 단다. 모두 평민의 모습 그대로다. 놀이에는 사물놀이뿐만 아니라 물장구도 등장한다. 서민들의 춤판, 그 놀이의 향토성과 놀이꾼 구성의 춤이나 가락에 있어서 이들의 난장은 특별하다. 그 난장 사이에는 한 해 농사를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달려온 농사꾼들의 숨결이 들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머슴이 주인이 되고, 일꾼이 양반 대접받는 모습에서 어색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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