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록 독후감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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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원록 독후감
무원록은 제목 그대로 죽은 자의 원통함과 남은 가족들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한 조선 유일의 수사 지침서이다. 조선시대 검시 지침서인 <무원록>은 원래 중국 원나라 왕여가 1308년에 저술한 책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 일본 등지에 전해져 널리 활용되었다. <무원록>이 간행된 지 100여년이 지난 1435년 (세종17) 조선의 조정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세종은 최치운을 중심으로 한 여러 신하들에게 무원록의 해설을 명하였다. 최치운 등은 명나라에서 간행된 <무원록>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고 <세원록>과 <평원록> 등을 참고하여 1438년 (세종20) 겨울에 <신주무원록>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1년여의 인쇄과정을 거쳐 1440년 봄 드디어 강원도 원주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내내 주검을 검사하는 일에 절차와 방법을 알려주는, 즉 검시의 교과서이자 지침서로 쓰였다. 일본에서도 신주단지처럼 모신 책이다. 그리고 주검의 검사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사 과정과 법 집행에서 주의할 점 그리고 절차와 서식에 대하여 기준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주검을 훼손하는 부검을 할 수 없는 제약도 있었다. 또한 점차 조선의 사회구조가 중국과 달라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무원록’의 경우 비상을 먹고 죽은 조항 자체가 없었다. 중국에서 비상으로 인명을 해하는 사례가 드물었는지 모르지만 조선에서는 비상으로 살해되는 사례들이 빈번했다. 혹은 임금의 명령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숙종은 무덤을 파내서 까지 검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범인들이 사건발생 후 재빨리 시체를 땅에 묻어 검험을 방해하는 폐단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다양한 변화에 대응할 필요는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 첫 번째 결과가 1748에 간행된 구택규의‘증수무원록’이었다. 세종대의‘신주무원록’을 기본으로 쓸데없는 것은 덜어 내고 빠진 것은 보충하여 전체적으로 일목요연해진데다 이해가 어려운 문구들과 단어들을 책 앞에 모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증수무원록 역시 중국의 공문서 양식을 그대로 두는 바람에 원나라의 방어가 많고 조어가 간략하여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한편, 18세기 말 구택규의‘증수무원록’을 이어 그의 아들 구윤명은 더욱 업그레이드된 형태의 버전을 내놓았다. 순서와 분류를 보다 완전하게 정리하는 동시에 당시까지 남아있던 중국식 말투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형부서에서 만든‘세원록해설본을 들여와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고 오자와 탈자 등 문장을 교정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현실 또한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다. 이는‘증수무원록대전’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 였다. 특히 구윤명은 문구나 용어사용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법률학자 김취하의 감수를 받았는데 전문가의 검수를 받고 그 결과를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써 더욱 완벽한 법의학 서적이 될 수 있었다.
1790년 정조는 서유린에게‘증수무원록대전’을 언해하도록 명하였다 어려운 한문본을 언해하여 널리 보급하려는 목적이었다. 역시 김취하가 시종작업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언해’가법의학지침서라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내용의 대부분이 검시, 즉 사체관찰기술이라는 점은 그리 놀랄 일이아니다 오히려 검시의 핵심이 시체의 안색을 관찰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이 더 흥미로울 것 이다. 사체의 상태를 중시한 ‘언해’의 검시방법은 사물의 색을 통칭하는 안색의 종류에 따라 죽음의 원인을 달리 파악하였으므로 색에 매우 민감하였다. 사체의 색은 죽음의 원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푸른색은 독살, 흰색은 동사, 황색 은병사 등 이 그것이다. 이처럼 검시기술이 안색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안색을 위장하여 타살의 흔적을 제거하는 기술도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위장한 상처를 발각하는 방법 또한 개발 될 필요가 있었다. 이 경우 활용된 것이 바로 법물들이었다. 법물이란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 도구 및 수단들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100% 순1도의 은비녀가 있다. 이 밖에도 지게미, 초, 파, 부분 천 초, 소금, 매실과육 등과 창출 등의 약재도 사용되었으니 지게미 초, 파, 매 실 과육 등은 사체의 상흔을 드러내는데 사용되었고 창출, 조각은 시체가 놓인 곳의 악취를 제거하는 용도로 활용 되었다. “상처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흔적이 의심스러운 부위가 있으면 먼저 그 부위에 물을 뿌려 적신 후에 파의 흰 부분을 짓찧어 상흔이 있는 곳 에 넓게 펴 바르고 초에 담가두었던 종이를 그 위에 덮어 둔 채 한 시간여를 지난 후 이를 걷어내고 물로 씻으면 상처가 바로 나타날 것 이다” 그리고 후기로 이행하는 동안 조선사회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조 선전기의 법의학지식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으니 연탄가스사고가 그 중하나이다.
사인을 분석하는 방법과 태도역시조선전기에 비해 더욱 세밀해지고 정교해졌다. 죽은 자 라도 살찐 사람과 마른 사람을 구분하여 살찌고 젊은 자는 빨리 상하는 반면 마르고 늙은 자 는 천천히 부패한다든지 또는 남과 북의 기후가 같지 아니하므로 지역의 편차를 고려해야한다든지 산 중의경우기후의 변화가급격하여 시체의 부패정도에 따른 사망시간을 추정하기가 어려우므로 더욱 신중해야한다고 지적한 것 등 이 그러한 사례다 .
사건을 조심스럽게 취급하려는 큰 이유 중하나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살해 후 자살로 위장하는 수법들이 점점 더 발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전과 사후의 상흔을 구별하는 방법 역시 발달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는 검험의 대상이 되는 시신의 시간적 경과에 따른 변화상태, 사인규명에 필요한 각종 법의학적 지식, 검험에 필요한 재료 및 검안서식의 수속기록절차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는 이 책은 우리나라의 법의학 역사에 일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동양의 가장 뛰어난 법서로 평가된다. 조선에서 누적된 다양한 지식과 수사기법들을 대거 수록함으로서 조선의 법의학 수준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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