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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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에 대한 연구
1. 1959.5.<400번의 구타>, 칸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상영되다
1959년 5월4일 일요일 저녁. 칸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선정된 <400번의 구타>가 상영되었다. <400번의 구타>는 이미 파리에서 첫 시사회를 가졌고, 4월 27일에는 칸에서 야간 시사회를 가졌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참석하는 공식 상영은 5월 4일이었다. 트뤼포는 지인들을 찾아 다녔다.
명예심사위원장인 장 콕토,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그리고 영화제 취재차 온 ‘아르’지에서 파견된 자크 오디베르티의 얼굴을 보며 다소간의 위안을 얻었다. 세 사람은 이미 파리에서 <400번의 구타>를 보았고 어느 정도의 성공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뤼포의 얼굴은 긴장으로 인해 창백했다. 이윽고 상영이 끝난 후 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젊은 감독을 찾아 기립 박수를 보냈다. 칸 영화제의 전통이 되어버린 풍경이 이날 밤에도 어김없이 펼쳐진 것이다. 명예심사위원장인 장 콕토에 의해 소개된 트뤼포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2. 감독상을 수상하며 칸의 새로운 물결로 일어선 트뤼포
다음날 주요 언론의 1면에는 ‘28세의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14세의 스타 장 피에르 레오 칸에서의 승리, <400번의 구타>’라는 표제가 실렸다. 5월 7일자 ‘렉스프레스’는 표지로 장 피에르 레오를 내세웠고 영화를 둘러싼 전모를 자세히 다루었다. ‘아르’지 역시 오디베르티가 쓴 기사로 채워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예술가들로부터 축전이 날아왔다.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단은 트뤼포에게 감독상을 수여했다.
<400번의 구타>는 6월 3일에 파리 샹젤리제의 두 개 관에서 개봉되었다. 이 작품은 45만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파리에서도 단관 개봉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단, 흥행작에 한해서는 장기간 상영이 되었다.)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낳았다. 오늘날 프랑스 영화의 신화처럼 전해지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영어로 ‘New Wave, 즉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이다. 신속한 촬영, 새로운 젊은 배우를 통한 동시대의 이야기, 스튜디오가 아니라 자연광을 이용한 야외 촬영, 적은 예산과 소규모 인원의 제작 방식은 <400번의 구타>를 통해 절정에 달했다. 이후 3년간 170명에 달하는 감독이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으며 누벨바그는 문화 운동이자 신화가 되었다.
앙투안 드 베크와 세르주 투비아나가 쓴 전기인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따르면, 누벨바그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것은 1957년 10월 3일자 ‘렉스프레스’지였다. 프랑수아즈 지루는 ‘젊은이들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누벨바그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1958년 6월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누벨바그, 젊음의 초상>을 펴내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영화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저작이었지만 프랑스 사회의 내부 변화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역할을 펼쳐 보였다. 1959년의 칸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통해 각광 받은 <누벨바그>를 통해 다시 한번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제 누벨바그에 대한 토론은 하나의 현상이자 이슈가 되었으며, 칸 영화제가 끝난 후 몇 개월 만에 누벨바그에 관한 책이 프랑스에서 간행되기 시작했다.
트뤼포는 칸을 비판하는 공격적인 기사를 통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트뤼포의 행적을 생각해 보면 칸 영화제의 감독상은 누벨바그라는 사회적 현상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2년 전 칸 영화제의 개막전인 1957년 4월 20일자 ‘아르’지를 통해 트뤼포는 칸 영화제를 공격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칸 영화제의 미래는? 다섯 심사위원이 한림원 회원, 문학의 득세 예상”이라는 공격적인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선전포고를 했다. 젊은 날의 트뤼포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 평론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당시 ‘아르’지는 트뤼포가 기고하는 주요한 매체였다. 5월 15일 영화제 폐막 시점에 맞춰서는 “독자들 모두가 재판의 증인. 잘못된 전통 아래 괴멸하는 프랑스 영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분노를 일으켰다. 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은 반론 게재를 요구했고, 6월 12일자 ‘아르’지를 통해 반론이 게재되었다. 이듬해 칸 영화제는 영화제 취재 허가증을 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뤼포는 칸 영화제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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