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군도》- 산산조각 난 제국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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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군도》 : 산산조각 난 제국의 꿈
일본이 ‘절대국방권’으로 설정하면서까지 사수를 결의하였던 사이판은 1944년 7월 7일, ‘옥쇄를 통해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다’라는 결별전보를 마치고 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사이판 사수를 위하여 투입된 31,000여 명의 일본군 병력 가운데 921명의 포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옥쇄’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간인 사망자만 24,000여 명이 발생하였다. 사이판 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처음 듣는 이에게는 충격적인 수치일 수 있겠지만, ‘태평양의 방파제’를 자처하며 죽음을 택한 일본인들의 이야기는 비단 사이판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태평양의 섬들에 미군이 진공해 들어오면 하나같이 비슷한 비극들이 연출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군 신화’에 경악했다. 이쯤 되면 과연 일본군들의 절망적인 항전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들이 죽어간 땅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제국의 패망 이후로도 여전히 남양군도(南洋群島)가 호명되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반문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국방권이라는 조어에 혹자는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사이판을 포함한 이른바 남양군도는 일억옥쇄(一億玉碎)를 부르짖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그토록 신성시하던 일본의 국토도 아니요, 전통적인 일본의 통치공동체와는 전혀 무관한 지역이었다. 애당초 이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던 이들은 일본인들이 아닌 통상 ‘차모로’로 불리는 원주민들이었다.
대항해시대 이래 세계사의 궤도가 본격적인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로 치달으면서 미크로네시아를 비롯하여 태평양에 흩어져있는 도서지역들 또한 침략의 총검 아래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스페인,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서구 열강들은 각자의 이권 획득과 세력 팽창을 위하여 태평양으로 총구를 돌렸다. 대부분의 경우 당연하게도 원주민들의 의사와 문화는 고려될 여지도 없이 무시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해야할 피조물들이긴 했지만 서구인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주민들은 합의나 우정의 대상이 아닌 그저 교화의 대상일 뿐인 미개인들에 불과했다. 각국의 이해에 따라 온갖 분쟁과 매매가 차모로 원주민들의 머리 위로 진행되었다. 환난이 거듭되고 지배세력이 교체되는 동안 원주민들은 죽어갔고, 살아남은 이들은 변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아입구를 꿈꾸며 새로이 열강에 진입하기를 희망하던 일본의 눈에 띄었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양군도였다. 서구 열강의 침탈을 받는 아시아를 해방시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일본제국의 대표적인 슬로건은 남양군도 또한 비껴가지 않았다. 영국과 동맹하여 러시아를 타도하고 대륙으로 진격하기를 희망한 육군과 달리, 해군에서는 러시아와 친교하고 영국을 무찔러 대양으로 뻗어나간다는 원대한 포부를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여기에 발맞추어 원주민들과 합심하여 서구 세력을 축출하고 현지를 해방시키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일본 문학에서 유행처럼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일본인들이 꿈꾼 서구 세력의 축출이 원주민들의 주권 회복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해방은 곧 접수와 다름이 아니었다. 일본 또한 남양군도 접수를 꿈꾼 이래 남양군도를 접수하고 남양군도를 경영하다가 패전하여 남양군도를 상실하기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서구 침략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문명개화론에서 한발자국도 진일보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일본의 남영군도 경영은 문명개화론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신과 억압의 세월이었다고 표현해야 더욱 정확할 것이다. 일본 군당국자들은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남양군도의 ‘토인’들을 미개한 야만인들로 간주했지만, 여기에 더하여 토인들이 서구의 통치를 경험한 점을 들어 그들을 경계하였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다른 식민지 지역들에 비해 남양군도의 원주민들은 일본에 좀처럼 동화되지도 않았고, 훗날 너무나도 쉽게 연합군을 지지했다. 원주민들과 힘을 합쳐 해방의 기치를 높이 올린다는 일본인들의 소설은 그저 소설에 불과했음을 일본 당국이 스스로 입증하고야 만 것이다.
일본제국이 원하던, 특히 일본제국 해군이 원하던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요, 전진기지였으며 남진론의 거점이었던 남양군도는 일본제국의 욱일과 낙일을 함께 했다. 남쪽을 향한 로망, 제국을 향한 이상, 열광적 애국주의를 동력삼아 일본은 남양군도를 집어삼켰다. 일본은 ‘문명’으로부터 유리된 지역을 자국의 법으로 다스리며 계몽할 자격을 가진 주요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일본 해군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양 해군으로 팽창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이나 해군뿐만 아니라 내지, 조선, 오키나와 출신의 ‘황국신민’들 또한 남양군도에 대한 꿈에 부풀었다. 그들은 고향에서의 척박한 삶에서 탈출하여 바다 건너에서나마 새로운 삶을 일굴 수 있기를 바랐다. 그 허실이 어찌했든 간에 남양군도가 실제로 갖는 경제적·전략적 가치 이상으로 일본에게 남양군도가 갖고 있던 의미의 무게는 무척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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