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향수의 시인 정지용) - 답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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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향수의 시인 정지용) 답사 보고서
답사 장소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소재 정지용 생가 및 문학관
1. 정지용의 출생
충북 옥천읍에서 북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곧게 뻗어 나간 산줄기, 일자산(一字山)이 있다. 이 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청석교(靑石橋)이다. 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이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연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고, 하동 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하여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지용의 아명은 지용(池龍)이었다. 이 이름은 지용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비롯되었으며 본명도 이 음을 취해 지용(芝溶)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그는 출생에서 성장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들의 비상한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대 독자인데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방랑생활을 했으니, 그에게 거는 어머니의 기대는 더욱 컸으리라. 그의 부친은 한때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한의술을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 한의업을 개업하여 재산을 꽤 모았으나, 어느 해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 가난했다고 한다. 원래 연일 정씨들이 집단촌을 이루며 살던 곳은 충북 수북리 꾀꼴 마을이었는데, 그 본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하계리 개천가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때 지용의 부친은 처가 친척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지용은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회고한 바 있다. 4대 독자로서 느껴야 했던 숙명적 고독감과 부친의 방랑과 실패, 가난 등으로 어린 지용은 불행했다.
어린 시절 고독과 빈곤 속에 성장한 지용은 현실과는 다른 아름다운 꿈과 동경의 내면세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자연스럽게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또 그가 불행한 환경 속에서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꿈을 가지고 문학적 상상력을 개성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었던 심리적 요인으로, ‘개천에서 난 용’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감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기대감은 그를 긍지가 강한 인물로 성장하게 만들었고, 이는 유년의 불행을 극복하는 정신적 힘이 되었으며 커서는 문학적인 상상력을 완성시키는 정신적 자양이 되었던 것이다.
2. 정지용의 생애
정지용의 생애는 출생하여 옥천의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4년 간 한문을 수학하기까지의 유년기(1~16세),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다닌 청년기(17~28세),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를 지낸 장년기(29~44세), 해방에서 625전쟁 중에 납북되기까지의 말기(44~49세)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시기별로 지용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데 따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용의 시 세계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시기는 유년기와 청년기라 할 수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 지용의 객지생활은 시작된다. 14세에 상경하여 4년 간 한문을 배웠고 5년 간 고보를 다닌 후, 6년 간 일본 유학생활을 했다. 지용은 이렇게 14세부터 28세까지 15년 동안이나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의 객지체험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체험이 그의 시 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다.
먼저 휘문보고에서 유학시절까지를 보면 지용은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휘문고보는 성적이 우수하고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재학시절에 장학금을 주었고, 졸업 후에도 유학 비용을 부담했다.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16년 간 재직하였으니 지용은 통산 27년 간 휘문과 관계를 맺은 셈이다. 휘문고보 1학년 때부터 문예활동을 시작한 지용은 그의 발안으로 명명된 동인지 『요람(搖籃)』의 산파역을 맡으며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요람』의 동인은 고보와 전문학교 학생들로, 지용과 박제찬, 박팔양, 김화산 등이며, 지용이 간부로 있는 휘문고보의 등사기를 이용해서 제작하였다. 지용은 『요람』에 『정지용시집』 3부에 수록된 동시의 절반 이상을 발표했으며, 2학년 때는 『서광(曙光)』지에 『3인』이라는 소설도 발표하여 일찍부터 문재를 발휘하고 있었다. 지용은 또 학생자치회와 동문회를 연합한 재학생, 동문의 자치기구인 <문우회>의 학예부장이 되어 휘문고보 교지 『휘문』 창간호를 발간했다. 여기에 그의 최초 번역물 3편, 『퍼-스포니와 수선화(水仙花)』, 『여명의 여신 오-로아』,『기탄잴리』 103장 가운데 1~9장을 번역하여 실었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당시 인도는 물론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신화적 인물인 타고르의 노벨상 수상작을 무명의 고보학생이 처음으로 번역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용의 원대한 시적 포부를 느낄 수 있다. 김억이 『기탄잴리』를 완역한 것이 1923년 4월인데, 지용은 이보다 조금 앞서서 번역을 시도했던 것이다. 지용은 학업성적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예활동도 활발하게 하여 교사들의 귀여움을 받은 것은 물론 학생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사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순응형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2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학교마다 휴교 사태가 발생했다. 휘문고 학생들도 많이 검거되었고 그 여파로 이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도서관, 기숙사, 강당의 건립을 강력히 요구하며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 사건에서 지용은 이선근과 함께 주동자가 되어 집회에서 연설을 했고, 그로 인해 무기정학을 당했지만 선배들의 중재로 곧 구제되어 무사히 졸업을 했다는 것이다.
지용은 졸업과 동시에 휘문 교비로 일본의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6년 후인 1929년 동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국문단과 일본문단에 등단했다. 1926년 6월 『학조(學潮)』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의 시와 시조 및 동요를 포함한 9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어서 『조선지광(朝鮮之光)』, 『신민(新民)』 등에 작품을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고, 일본의 『근대풍경(近代風景)』에 3년간(1926. 12~1928. 2)『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위』 등 시 13편, 수필 3편을 발표했다. 『근대풍경』의 편집인은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였는데, 그는 유학시절의 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끼친 일본문단의 비중 있는 문인이었다. 하쿠슈는 『근대풍경』을 창간하기 이전에 이미 10개의 잡지를 간행한 경험이 있으며 1930년에 18권의 전집을 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용이 일찍부터 시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시어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하쿠슈와의 간접적 만남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기간 중에 지용에게 영향을 준 시인으로 또 윌리엄 블레이크를 들 수 있다. 지용의 졸업논문이 바로 『Imagination in the Poetry of William Blake』였다. 그는 『시문학』 2호에 『봄에게』와 『초밤 별에게』를, 『대조(大潮)』(1930. 3)에 『소곡 1』, 『소곡 2』, 『봄』을 번역하여 발표했다.
<검정두루마기의 교사시인>
지용은 1929년 3월 도시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9월에 모교 영어 교사로 취임했다. 취임 후 곧 분가하여 종로에 살림을 차렸다. 기나긴 타국타향살이를 끝내고 마침내 가정이라는 안정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는 12세 때 은진 송씨 재숙(在淑)과 결혼했지만 15년 간이나 헤어져 살았다. 장남 구관(求寬)도 27세 때 얻을 수 있었다. 지용은 이제 학생에서 교사로, 하숙생에서 한 집안의 어엿한 가장이 된 것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 지용은 1930년 『시문학』 동인에 가담하게 되면서 문단의 중심권에 자리를 잡게 된다. 『시문학』의 출발은 김영랑과 박용철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동인지를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그들이 문단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시 한국문단과 일본문단에 이미 알려진 정지용 시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의 입장과 지용의 시적 경향, 그리고 한국문단의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이제 한국문단은 ‘순수시 운동’을 운위할 수 있게 되었다. 지용은 용아(龍兒) 박용철이 『시문학(詩文學)』에 이어 발간한 잡지 『문예월간』과 『문학』에 계속 작품을 발표했고 이런 인연으로 용아는 지용의 첫 시집 발간을 주선하여 시문학사에서 『정지용시집』이 발간되었다. 지용은 1933년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靑年)』의 편집 고문역을 하며 여기에 많은 신앙시를 발표했다. 8월에는 반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이종명, 김유영이 발기한 <9인회<의 창립회원(이태준,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조용만 등)이 되었다. 이종명, 김유영 두 사람은 초기 탈퇴하고 주도적 역할을 상허(尙虛)와 지용이 하면서 휘문 동문인 박팔양과 김유정을 끌어들였다. 이러한 문학활동 가운데 이제 지용은 『문장(文章)』지의 시부문 고선위원이 되면서 30년대 시단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 『문장』지는 김연만이 출자하고 상허가 편집을 맡은 문예지였는데, 이 잡지를 출발로 하여 한국문단의 추천제가 정착되었다. 그만큼 추천이 엄격하고 권위가 있었다. 추천 분야는 셋으로 지용이 시를, 상허가 소설을, 가람이 시조를 맡았는데, 여기서 지용은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청록파 시인을 비롯해 이한직, 김종한, 김수돈, 황민, 박남수 등의 시인을 추천했다. 그는 추천을 하고 나서 꼭 추천사를 썼다. 이 추천사가 당시 추천을 받으려는 시인 지망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으로 지용의 아류가 양산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민족시인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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