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철학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읽고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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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읽고
인간에게 죽음은 항상 미지의 존재이다. 존재를 부정함은 어려운 일인 것 같지만, 삶 속에 만연하다. 두려움과 공포, 혹은 망각으로 죽음을 부정한다. 하지만 언어로서 존재함이나, 인간 본질적으로 죽음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순간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또한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각자의 삶을 산다는 인간들 중에는 이미, 미리 죽어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없는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육체만이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인지하는 나라는 존재를 부분으로서 사유하다 보면, 내가 아닌 어느 한 부분이 있을 뿐이며, 나라는 전체는 부분으로서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말이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에도 의의가 있음을 안다.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같은 것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멸로서의 죽음에서, 인간이 변화하는 것으로의 죽음을 인정 할 수도 있고, 실존적 삶의 도구로서 죽음을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을 죽음으로서 보는 것뿐이고, 결론적으로 죽음을 인지하고 생을 바라보아야 한다. 좋아하는 그림 중 고흐의 <귀가 잘린 자화상>은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것은 귀를 잘랐던 광기일 수도 있고, 후회나 자기학대성일수도 있다. 나는 그것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고흐의 생각을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그런 그림을 그린다면, 나는 죽었고, 그리고 살아 있으며 그것은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음으로 해결되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고흐가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필연의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고흐가 본 것은 또 다른 죽음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삶인가. 삶은 누가 사는 것인가. ‘나’의 존재가 사는 것이 나의 삶이고, 그 삶이 하나의 우주고 세계라고 생각한다. ‘나’는 행복의 주체이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의미를 사는 무엇인가다. 전체에서, 부분의 합을 제하면, 남는 것이다. ‘나’를 정의할 때 일반적으로는 나의 부분을 경험적으로 설명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나를 포장지로 감싸는 것이다. 포장지로 감싼 선물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포장지를 뜯지 않고 그 안의 내용을 다르게 말한다면, 우리는 포장지를 뜯기 전까지 그것을 들은 무엇인가로 믿게 되어버린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를 착각하고, 그것은 삶 속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런 경험들을 지워갈 때 발견할 수 있으며, 경험을 지우는 것 또한 다양한 사유로서 분화된다. 프로이트와 라깡은 무의식의 존재에서 오롯이 나의 존재가 있고, 나의 존재가 생각하는 것이 자명하다고 했고 석가는 자아의 존재 자체가 오온이라고 생각하는 무아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깨달아지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나를 대상화 할 수 있다. 칸트는 경험과 이성을 동시에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 가운데의 주체를 명확하게 발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영이다. 라고 배운 것은 이번 학기이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인 ‘영’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육체 안에 존재하며 생명을 주고 마음을 움직이는 무형의 실체’. 수업을 들으면서 어려웠던 ‘영’의 개념이 정리되었다. 몸이 원하고, 이성이 있고, 영이 움직인다. 마음이 ‘발견’되지만 그 과정을 모르고 있었다. 이 마음은 ‘나’, 즉 영의 하인이다. 인간은 몸적 자아를 ‘나’와 동일시하며 살아가기 쉽지만 이것은 내가 사는 길이 아니고, 내 몸이 원하는 것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내가 없는 삶은 죽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를 찾았을 때, 우리는 일종의 죽음을 제대로 직면한 것이고, 삶을 바라볼 수 있다.
행복과 행복감의 구분은 <만남, 10차원의 행복>을 할 때 알게 되었고, 많은 사유를 할 수 있게 했다. 행복지수는 행복지수가 아니다.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이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지 않으며, 욕망과 불만을 생성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욕망하지 않아서 행복하다는 착각 또한 하는데, 그들은 욕망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고 그저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물질적이고 중독성이 있는 행복감은 행복보다 수치화하기 쉽지만, 그것이 행복이 아닐뿐더러, 욕망과 관련해서 행복함을 판단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행복감은 항상 그 반대편의 얼굴이 존재하며, 그것을 의미로 하다가는 삶이 무의미해 질 수 있다. 행복함이라는 돌덩이를 정상 위까지 올리려 하지만 올리지 못하는 시시포스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돌덩이라는 습관에서 벗어나서, 잠시 쉬고(여기까지가 흔하게 이야기하는 실존주의라고 한다면) 더 나아가 ‘나’를 찾아서 행복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수업과 책에서 행복감에 대해서 배울 때 ‘올라갔던 것은 반드시 내려온다.’에서 이 신화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행복은 무조건적인 긍정이라는 맹신에서 오는 것은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되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긍정하는 것에서 온다. 나를 발견하고 빛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행복은 나를 좋은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삶을 그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나를 비운다는 개념은 고통을 직면했을 때, 포기와 무기력으로 대처할 가능성이 있다. 삶을 행복으로 채우는 것, 빛을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길이 남아있다는 것이고, 그 길에서 새로운 긍정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잉그리드 베르히만의 영화 <제 7의 봉인>을 보면, 주인공에게 죽음이 찾아오는데, 그 죽음을 마주하고 체스 게임을 제안한다. 그리고 신의 대답을 얻을 시간을 벌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 흑사병이 도는 유럽의 끔찍한 모습을 바라보고, 여러 일들을 겪게 되지만 죽음과 신 사이에서 그는 그저 질문할 뿐이다. 하지만 그 하인은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이고, 행동에서 여러 미덕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강의를 듣고 이 영화가 생각이 났다. 삶의 길을 ‘종교’라고 명하는 순간 우리는 그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되고 종교를 가지는 것에 무관한 빛의 길들을 못 보게 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는 질문한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나로서 사는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일 것이다. 죽음 옆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인간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욕망한다. 주인공은 신의 대답을 원했기 때문에 질문한 것이고(신의 대답이 대답이었는지는 주인공에게 명확하지 않지만), 하인 옌스는 남을 돕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 우리는 모두 원하는 대로 선택한다. 그것을 선택한 우리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수업시간에 왜 정의는 지켜지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이 정의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배웠듯, 다른 모든 것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낙태를 원하기 때문에 낙태를 하는 실태가 있는 것이고, 뇌사 판정을 원하기 때문에 뇌사를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욕망 때문에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결과일 뿐이고, 그것이 살인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을 할 때는 내가 없다. 나와 너와 일치한다. 즉 내가 너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남에게 다 내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어준다는 의미는 상대방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지는 주체가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소유와는 가장 먼 형태여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유가 착각된 결과이다. 서로가 서로를 소유한다는 것에서 합의된 계약일 뿐이다. 소유는 자신을 파괴한다. 상대방이 타자로서 존재할 때 언젠가는 헤어지기 때문에 주체는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증오, 집착, 좌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주체가 상대방에 용해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기에 두 사람은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욕망은 만족이 없다. 하나가 만족되었다고 착각하게 되면 다른 욕망이 나타나는 고리이다. 그 욕망은 본질적인 것과는 멀어져 갈 수 밖에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에 중독된다는 것은 극단으로 치닫는 일이며, 극단은 양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하나가 되어 갈 것이며, 그것은 삶을 행복으로 착각하게 하는 동시에 죽음으로서 끝나는 길로 가게 한다.
언어는 존재에 필연적인가 하는 문제에서, 책을 읽기 전 까지는 언어가 가지는 힘을 맹신했던 것 같다.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로 규정 가능하고, 언어로 규정하는 순간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르트의 기호론을 보았을 때, 텍스트는 텍스트로 존재할 수 있으며 기호는 의미를 빗겨가기 때문에 기표는 의미를 놓칠 수밖에 없으며, 언어는 규정하지만, 본질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규정하는 의미를 가두어버린다고 할 수 있고 내가 그 존재 자체를 만나는 것을 막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언어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도구이기 때문에, 언어가 나오는 의미가 어디서 나오는 지 봐야 하는 것이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몸에서 나오는 언어가 아닌, 영적 ‘나’에서 나오는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다.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의미 있는 타자를 만나고 너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나의 언어는 사랑일 것이다. 또한 나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너의 말도 사랑일 것이다.
얼마 전 본 영화 <매드 맥스>는 훌륭한 액션영화이기도 하고, 페미니즘의 일부를 대중문화에 섞은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본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에 주목했다. 죽음과 다르지 않았던 생활에서, 여성들(주체)는 떠난다. 생명이 있는 곳으로 떠나지만 가는 길은 좌절이 있고, 억압과 폭력이 존재한다. 타자의 보호나 사용에서 벗어나서, 가능성이 없는 죽음으로서의 행보는, 사실은 생을 위한 죽음으로서 떠나야만 삶을 만날 수 있었던 필연적이고, 주체적인 죽음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본인들이 살던 장소이고, 생명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주체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살아 있게 되었고, 죽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죽음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삶을 찾아야 한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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