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을 읽고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3페이지 /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1
2
3
추천 연관자료
- 본문내용
-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읽고 3부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이하 ‘저자’라고 함)가 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르네 지라르 저, 김치수 외 역,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한길사, 2009.
에서는 소설가들의 작가적 입장을 주로 다루었다. 9장에서는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중심으로 저자의 비평이 전개되었다. - 콩브레는 그들에게 익숙한 가족처럼 친숙한 부르주아 스완을 알지만 사교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련된 귀족인 스완의 다른 모습은 알지 못한다. - 를 언급하여 - 소설가만이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충되는 인식들 사이에 가로 놓인 심연을 뛰어넘을 수 있다. - 고 했다. - 소설가는 본래 인간이 전혀 보지도 만지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 즉 모순되는 만큼 절대적인 두 가지 명백한 인식을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게 한다.(271쪽) - 고 했다.
- 비평가들은 흔히 프루스트는 유서 깊은 귀족계급에만 관심이 있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은 ‘규모와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불리한 평가 뒤에는 소설예술에 대한 사실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해묵은 개념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천재적인 소설가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시시콜콜한 목록을 작성하여 우리에게 경제적 사회적 현실에 대해 가능한 한 완벽한 파노라마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진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면, 프루스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는 소설가가 되리라. … 프루스트는, 단정적인 어조로든 잡다한 물품들의 열거로든 간에, 자기가 ‘자료를 철저히 조사했다’는 암시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학자의 관심을 끄는 어떠한 질문에도 프루스트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가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고 무심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 소설가의 진실은 총체적이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삶의 모든 양상을 포괄한다. 비록 소설이 어떤 양상을 소홀히 다룬다 하더라도 소설은 틀림없이 하나의 전망을 가리킨다.(295~6) - 고 했다.
이 부분은 필자도 공감한다. 어떤 소설의 주인공이 페인트 공이라고 가정할 때 벽에 칠할 페인트의 배합비율과 벽의 상태에 따라 칠할 때 힘을 얼마만큼 주어야 한다는 등의 설정은 필요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소설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바가 그것과 상관이 있을 때에는 서술해야 할 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의 소외는 형이상학적 욕망과 비슷하다 … 부르주아 사회를 제거한다고 해도 사회적 계급은 폐지되지 않고 예전의 소외가 사라진 곳에 새로운 소외가 나타난다(302~3) - 고 했다. 합당한 말이다. 진보세력이 기득권을 갖게 되면 보수로 바뀌는 건 확실하다. - 사회 지도층을 묘사한 작가는, 그가 형이상학적 욕망을 그저 반영하고 있는가, 그것을 폭로하는 데 성공했는가에 따라 가장 피상적일 수도 가장 심오할 수도 있다(308) - 고 했다.
10장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세르반테스를 차용하여 프루스트를 투사시켰다. - ‘감정을 숨기고 말만 드러내기’ 라는 방식은 프루스트가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식으로서, 그의 작품에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가 위의 인용문에서 훌륭하게 규정한 것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법이다. 그런데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 이러한 실책이 프루스트의 성찰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에게 이 문장에서 말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적 울림을 문학의 무의식적 차용의 탓으로 돌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가치를 올린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다. 일치는 우연일 수 없다.(325~6) - 라고 했다. 이 부분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패러디를 언급한 것 같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디를 펼쳐 읽기 시작해도 언제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한 줄도 빠짐없이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야만 한다. … 두 소설가 중에서 이해받지 못할 가장 심각한 우려가 있는 쪽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이다.(327) - 라고 했다. - 소설의 영역들은 서로 ‘접합되어’ 있다. … 소설 주인공의 모험이 나아가는 방향은 언제나 동일하다. … 수백 명의 주인공이 있지만 소설문학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험을 펼치는 주인공은 하나뿐이다.(334) - 라고 했다.
그런데 10장에서는 주목할만한 저자의 실수가 있어서 필자가 지적한다. 저자는 - 두 가지 오해를 대조함으로써 프루스트는 두 가지 인식의 특성을 드러낸다. … 돈키호테가 마술투구로 보이는 것을 이발사는 그저 단순한 이발대야로 본다.(311) - 라고 서술했다. 여기에서 저자는 돈키호테의 오해와 이발사의 오해를 더하여 두 가지 오해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가 확인해본 결과로는 이발사가 이발대야로 본 것은 오해가 아니었다. 본래 이발대야였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오해가 아니라 한 가지의 오해일 뿐이었다. 또 돈키호테도 반짝반짝 빛나는 구리 이발 대야를 전투할 때 쓰는 투구로 착각했을 뿐 마술투구로는 오해하지 않았다. 미켈 데 세르반테스 저, 박철 역, 『돈키호테』, (주)시공사, 2005, pp.626-636.
자료평가
-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