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Interesting Time 에릭홉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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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esting Time-에릭홉스 봄
읽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던 670쪽의 어마어마한 분량이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에릭 홉스 봄에겐 670쪽도 적은 분량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든다. 격동적이고, 어느 때 보다 더 혼란스러운 20세기를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역사가로서, 자신보다 미래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많았을 듯싶다. 자신이 겪어야 했던 뼈아픈 역사를 되 물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가 보여주는 진리들을 후대 사람들이 알고 적용하거나 발전시켜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홉스봄은 태생부터 격정적인 20세기 역사의 산물이었다. 영국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홉스봄은 ‘원정출산’으로 인해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적국이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영국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기에 중립국인 이집트를 선택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대에 태어난 홉스 봄은 유년시절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가 태어나고 2년 후에 다시 빈으로 돌아왔지만, 대공황으로 그의 가계는 많이 기울었고,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백방으로 일자리를 구하시는 도중, 어느 겨울날 심장마비로 집 앞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이 거의 없었다는 글과 아버지의 죽음을 담담한 어조로 서술하는 모습을 읽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홉스봄이 가엾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빈에서 제법 잘사는 축에 들어가는 보석상의 세 딸 가운데 차녀였던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드셨을 것이다. 변변하게 장은 못 봤어도, 가정부만큼은 절대 내보내지 않았다는 내용에서 그녀의 성장배경을 한 번 더 확인 할 수 있었다. 곱게 자란그녀였지만, 자식들을 위해 강인한 어머니가 되어야 했고, 집필 작업과 영어 과외로 인해 근근이 먹고 살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에릭 홉스봄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영어를 잘했기에, 과외를 하며 집안 살림에 큰 보탬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결국 2년 만에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고아가 된 그는 동생과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영특했던 그는 결국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가 공산당에 직접 가입하고 활동을 시작하게 된 시기가 바로 이 때 인데, 자서전에서 그는 ‘고대하던 공산당에 들어가서 정치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케임브리지로 왔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공산당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귀족 지식인 사회의 거점이었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는 공산주의 활동을 주도했고, 당이 해체하는 1991년까지 공산당원으로 남아있는 등 자신의 소신에 투철하리만큼 열정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홉스봄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끝없이 하늘을 향해 자란 대나무’였다. 단지,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있는 나무가 아닌 참나무처럼 속이 꽉 들어찬 대나무 말이다.
그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집에 얹혀 살아갈 때도, 대학에 입학해서 공산당원으로 활발히 활동할 때도, 아직도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열심히 하며 자신의 이상향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뚝심과 신념, 목표와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도 사람이었기에 한번쯤은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았을 까. 라는 생각이 든다. 표현하지만 않았을 뿐, 그에게도 외로움이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홉스봄은 철저히 ‘유대인 아닌 유대인’으로 살아 가야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상들이 믿었던 종교의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심정적 책임감을 느끼지 못 한다”, “한민족이란 이유만으로 내게 연대를 요구하는 작지만 호전적이고 문화적으로 낙후했으며 정치적으로 공격 일변도로 나아가는 민족국가에는 더더욱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또 그는 “중유럽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잉글랜드 사람이었고, 영국에서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였으며, 어디를 가도 유대인이었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도 다른 곳에서 유대인이 받았을 법한 왕따를 당했다”며 “개인으로서는 이것 때문에 살아가기가 고달팠지만 역사가인 나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홉스봄에게는 큰 상처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춘기 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법 한데 자서전에는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역사가로서의 사소한 자존심이었으리라. 고달픈 삶마저도 각별한 자산으로 만들어버린 그를 보며 역시, 큰 그릇은 다르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에 사로잡혀 살았던 홉스봄도 재즈를 무척이나 좋아한 사람이었다.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 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 라고 재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가짜 이름으로 ‘재즈 비평가’까지 했던 그는 재즈 자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재즈를 통해서 미국을 접하고 인권운동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었기에 더욱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실제로 자신을 “못 배운 사람들에겐 정치적 관심과 학문적 관심을 쏟아 부었던 지식인이자 공산주의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우세한 의견에 반기를 들기도 하면서,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대변하는 것이 그의 모습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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