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 타인의 삶을 꿈꾸다 - 영화 - 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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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9 /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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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타인의 삶을 꿈꾸다
영화 <타인의 삶>
“저를 위한 책입니다.”
이 한 마디를 위해 영화는 두 시간이 넘게 달려왔다. 뜯어내다 지칠 정도로 집안 곳곳에 설치된 도청 장치들은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함이었다. 겨우 마지막 대사 하나를 위해 두 시간을 소비하다니. 허무하다고 혹은 필름을 낭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타인의 삶>은 허무하지 않다. 오히려 마지막 15분이, 저 마지막 한 마디가 영화 전체를 장악하고 아우르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없게 한다. 대개의 영화에서 에필로그가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할 때, 절대 잘라낼 수 없는 <타인의 삶>의 마지막 15분이자 에필로그는 분명 특별하다. 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 앞선 시간들과는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걸까.
비즐러-되기, 드라이만-되기
국가안보국(슈타지)에서 일하는 비즐러는 극작가인 드라이만을 처음 보는 순간 그가 감시받아야 할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이때 함께 있던 옛 경찰학교 동기이자 상사인 그루비츠는 드라이만이야말로 동독에서 믿을 만한 마지막 예술가라고 편드는데,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루비츠는 비즐러에게 드라이만 감시를 부탁한다. 문화부 장관인 햄프와 그루비츠의 만남이 있은 직후의 일이었고, 이 만남의 이면에는 매력적인 여배우이자 드라이만의 아내인 질란트가 갈등의 핵으로써 존재한다. 그리고 마침내 비즐러가 드라이만 감시를 시작하기까지, 영화는 거의 20분가량을 소비한다.
처음은 좀 지루했다는 네티즌들의 평에 수긍이 간다. <타인의 삶>이 데뷔작인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플래쉬백과 같은 시간적 기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이 젊은 감독은 아주 천천히 바보 같다 싶을 정도로 정직하게 인물 하나, 하나를 사건이 진행되는 시간, 시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보통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혹은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영화 초반부를 강렬하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 법칙대로라면 <타인의 삶> 역시 이미 비즐러가 드라이만을 도청하는 것으로부터 영화를 시작했어야 한다. 하지만 <타인의 삶>이 위와 같은 방식을 취하지 않은 이유는 영화의 의도가 이야기의 구성적 쾌감이 아닌 바로 관객의 비즐러-되기, 비즐러화(化)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질 들뢰즈가 말했던 “되기(devenir)”의 문제는 단순한 외적 모방이 아니며, 카멜레온이 환경에 따라 제 몸의 색을 바꾸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닮기를 의미한다. 『현대미학강의』, 진중권 지음, 아트북스
즉, <타인의 삶>의 초반부는 관객과 비즐러의 거리를 좁히다 못해 관객으로 하여금 비즐러라는 존재 자체가 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영화는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에서 슈타지로써 가지는 자부심과 긍지, 그러나 사생활은 가족도 애인도 없이 휑할 정도로 쓸쓸한 비즐러의 이쪽저쪽을 모두 보여준다. 이제 관객은 비즐러의 눈을 통해 드라이만과 그에 관한 일련의 상황들을 알아나가게 된다. 약간의 시간차가 있는 때도 있으나 대체로 비즐러와 거의 동시에 주어지는 정보를 습득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굳이 이야기가 설명하지 않아도 비즐러가 생각하고 있을 법한 무언가를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일례로 서독에서 온 편집장이 터뜨린 샴페인 뚜껑이 스위치를 정통으로 때리는 순간, 그 속에 연결된 도청장치로 인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두 귀를 막는 비즐러를 보며, 우리는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음에도 그가 드라이만에게 분노와 괘씸함을 느낀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개별적 존재인 한 사람이, 또 다른 개별적 존재인 타인을 이해하고 알아간다는 것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함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되기’는 관객과 비즐러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되기’는 비즐러와 드라이만의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관객이 비즐러와 시간을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그러한 관계 속에 놓이기 때문이다. 함께 브레히트의 책을 읽고, 함께 예르스카의 자살에 가슴 먹먹해하고, <좋은 사람의 소나타>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린다. 여기서 특이한 한 가지는 질란트에 대한 사랑 역시 드라이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비즐러는 분명 무대 위의 질란트에게 첫눈에 반한다. 이것은 망원경을 통해 질란트를 유독 유심히 살피는 그의 행동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햄프가 드라이만으로부터 질란트를 빼앗아 가지려 했던 것과는 달리, 비즐러의 질란트에 대한 사랑은 드라이만에게 그녀를 돌려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가 이 영화의 리뷰에 붙인 “기이한 우정의 연대기”라는 제목은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일 테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즐러의 드라이만-되기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답은 단순하다. 드라이만-되기를 통해 비즐러는 슈타지로서의 삶에서 예술가의 삶으로 옮겨간다. 이제 적어도 비즐러의 내면만큼은 슈타지가 아닌 예술가가 되었으므로, 비즐러가 동독의 자살률에 관한 기사를 쓰느라 바쁜 드라이만을 대신해 작품의 내용을 창작해 보고서에 쓰는 건 갑작스럽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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