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희망이었던 약산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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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희망이었던 약산 김원봉
주제선정이유
김구나 여운형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1920년대부터 1950년대 우리나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김원봉에 대해 조사를 통해 그의 업적들에 대해 자세히 이해하고 싶어 김원봉을 주제로 잡았습니다.
1. 김원봉의 생애
김원봉은 경남 밀양출생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의열단단장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919년 그는 22살의 나이에 자신의 고향인 밀양 출신의 친구와 학교 친구들을 주축으로 삼고 그를 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은 폭력적인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결코 무고한 불특정 다수를 살상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더 큰 효과를 얻으려고 했다면 일본의 도심 한 복판에 폭탄테러를 감행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들은 5파괴 7가살이라는 정확한 목표를 세우고 무고한 인명의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5파괴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서울신문의 전신),경찰서를 말하며 7가살은 조선 총독, 고위 장교, 대만 총독, 친일파, 매국노, 매판 친일 자본가 등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압제 하에 있는 대만 총독까지도 우리와 같은 처지라는 생각에서인지 암살대상에 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의 항일 투쟁노선을 정당화하고 지표가 되는 이념을 확립하게 만드는 ‘조선혁명선언’을 써서 의열단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의열단은 그 당시 민족주의 우파 세력에 의해 주창되던 외교론 ·준비론·문화운동론 ·자치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임시정부와도 확연한 노선의 차이를 보였다. 그 당시 행해졌던 김상옥, 나석주, 김지섭 등의 의거를 통해 일제치하의 국민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활약을 했었다. 그러나 김원봉 자신도 테러활동의 한계를 느끼며 의열활동 만으로 독립을 얻을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동지들과 함께 중국의 황포군관 학교에 들어가 힘을 기르기 시작한다. 그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중국혁명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사회변혁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조선혁명 간부학교를 설립해 1940년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간부를 양성한다.
1930년대 임시정부라는 틀을 유지하고자 하는 김구의 세력과 임시정부 무용론을 주장한 김원봉과 진보적 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된다. 1935년 김원봉이 주도한 민족혁명당에 김구는 이런 이유로 불참했으며 이후 중국 관내 독립운동세력은 김구와 김원봉의 양대 세력으로 나뉜다. 1938년 김원봉이 조선의용군을 창설하자 김구도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창설한다. 하지만 결국 1941년 민족혁명당은 임정에 합류하게 되고 1942년 조선의용대 제 1지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으로서 두 세력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을 완성하게 된다. 해방 후, 김원봉은 임시정부 요인의 자격으로 귀국한다.
새로운 국가건설의 꿈에 부풀어있던 그를 맞이한 것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이었다. 그 시점에서 김원봉은 한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좌익 쪽인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던 김원봉에게 탄압이 가해졌다.
10월 항쟁과 전평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상황속에 검거되었던 김원봉은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조사과정에서 뺨을 맞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다. 일제 하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러한 상황속에 김원봉은 분노하고 좌절했다.
결국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석한 뒤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한 김원봉은 1958년 숙청당한 것으로 보인다.
2. 시대와 상황에 따라 김원봉을 바라 보는 여러 인물의 관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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