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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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산 정약용의 철학사상
I. 배경
1. 사회 경제적 시대상황
왜란(1592-1598)과 호란(1636-1637)등 엄청난 난리를 연거푸 두 번씩이나 치른 조선조의 경제, 재정실정은 비참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파생된 현상이 삼정의 문란이다. 이는 민생고의 원천이었으며 경제실학파의 대두의 원천이 되었다. 삼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한다. 농정국가에서 이 삼정의 문란은 국가 재정의 기초를 흔들어 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사회불안의 요소도 그 안에서 배태되었던 것이다. 수차의 전란으로 말미암아 농경지가 거의 황폐화되었다. 임란 전에 152만 결이었던 농지가 임란을 겪은 후에는 불과 54만 결에 불과하였으며 병란을 겪은 후에는 더욱 더 황폐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 이양기술, 농기구의 개발, 수리이용의 진보 등으로 농업이 발달해갔고, 전국시장 상대의 도매업과 화폐의 이용 및 자본축적에 의한 상공업의 발달로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였지만, 납세자인 농민의 생활은 피폐하여만 갔다. 특히 삼정의 문란을 기화로 한 지방관과 서민들의 부정부패 착취가 대부분의 중소농민들을 파산과 기아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점은 당시 아사자들이 각 지방에서 속출하였고, 화전민과 유민 및 도적단이 많았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경제적 환경과 모순 속에서도 양란의 복구과정을 통해 그 영농법을 개선함으로써 그 생산성을 높여갔다. 이양법, 광작농업, 상업적 농업은 조선후기 영농법 발달의 두드러진 점이다. 또한 생산성이 높아간 농토가 양반지주층, 서민지주층, 그리고 부농지주층에 집중되면서 종래의 영세한 자영농민층이 무사농민화로 급격히 농민의 분화현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18세기와 19세기 전반기에는 상업 면에서도 큰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독점적 상업의 발달과 그것에 대한 소 상인층의 발달로 요약될 수 있다. 조선왕조 본래의 상업정책은 이른바 ‘억상정책’이었으며 외국과의 무역도 이른바 사행무역 이외의 민간무역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억상주의, 쇄국주의의 상업정책도 왕조의 후기에 와서는 상당히 변해갔다. 17세기경에는 외국무역도 어느 정도 발달해서 개시무역이 후시무역으로 변하면서 밀무역으로의 성격으로 남아 상당히 발전을 보였고 시정상업에서도 상업인구의 증가, 상품경제의 발달을 결과로 성장해오는 사상인층의 압박을 저지하기 위하여 금난전권으로 사상인층을 누리면서 특권상인화해 갔다. 조선왕조후기에는 수공업부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조선전기의 관청수공업조직에 묶여 있던 공장들의 많은 부분이 그것에서 해방되어 자영수공업자 되었고 이들이 도시수공업자로써 상품생산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도시수공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도시수공업, 민간수공업의 발전이 곧 관수품의 시장 조달을 말하는 대동법의 실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 상업, 수공업의 변화와 함께 광산정책상의 변화는 <설점수세법>이 실시된 일이었다. 금광산에 실시된 이 제도는 광산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간자본이 광산개발에 차명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정부에서 광물산지에 재련장과 부대시설을 마련해 주고 광물채취에 필요한 재목 연료 등의 채벌을 허용하고 또 노동자를 마음대로 고용될 수 있게 하는 한편 채취하는 광물의 이부를 세금으로 바치게 한 것이다. * 정약용이 산 19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시기는 문호개방 전 조선왕조 사회의 마지막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조선왕조적 경제체제가 가지는 모순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시기이며 그 때문에 그 것을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카롭게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터럭하나도 썩지 않은 것이 없다" 고 할 정도로 한정된 지배 권력을 놓고 벌이는 당쟁, 탐관오리의 착취, 토지의 겸병 등 극한적 상황 속에서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일반백성은 최저 생존마저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지도층에 대한 저항의식을 높여 주었으며 당쟁으로 분열된 지도층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반란에 대처할 능력마저도 상실하고 있었다. 이러한 극한적 상황 속에서 일반백성, 특히 농민의 인구이동성을 증가시켰고, 이것은 농민의 정치의식을 높여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농민의 정치의식은 시장경제와 화폐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계층질서의 변화가 일어났으니 노예층이 자유민이 되거나 양반이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동시에 일어나는 등의 사회적 계층이동이 활발하였다.
2. 종교, 학문적 시대상황
종교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살펴보면, 도교계통 역시 16세기 초에 그 신앙의 총본부인 소격서까지 유학자들에 의해 혁파당한 처지에서 이 시대에는 풍수계통을 통해 정감록 같은 유형으로 새 인물 정도령에 의한 새로운 역성혁명의 의식을 민간사이에 유포, 고취시키면서 당시 지배층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당시 연경대신이 조심스럽게 도입하였던 천주교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를 살아가던 백성들은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의해서 최저의 생존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종교적 의식이 아니면 반정부적 민란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지도층은 반체제적 사상인 천주교에 대하여 탄압을 하였다. 그러나 이 서양의 새로운 종교는 백성들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갔는데, 그것은 아마도 당시의 일반백성들은 현실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새로운 정신적 안정을 달리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천주교 및 서구과학으로서의 서학의 충격과 아울러 처의 고증학이 전래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양명심학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던 이학 비판의 사고 경향이 더욱 높아져 갔다. 이학의 약점과 이학적 풍토의 비리 비판적 성찰이 심화되면서 그 대비책으로 개혁의 노력까지 일어남으로써 마침내 17세기 이후의 유학계에는 종전의 이학과 다른 방법, 내용, 성격의 학문이 실학인 것이다. 박세당 윤집 등이 사문난적의 지란을 받을 정도로 비주자적 경전해석을 시도한 것이 결학에 있어 이학을 벗어나려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일면의 실학자들이 역설한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구호가 바로 명분위주의 이학적 풍토가 빚던 무실한 폐단을 시정하려한 보다 철저한 실제성 중시의 실학정신을 입증한 것이다.
II. 정약용의 주요 사상
다산의 사상이 전시대의 사상과 달리하는 가장 큰 특징은 성(性)을 리(理)로 보지 않고 기호(嗜好)라 본 점에 있다. 성(性)을 고정된 리(理)로 보지 않고 기호로 본다는 것은 커다란 발상의 전환이자, 전통 성리학을 탈피한 것이다.
1. 전통 성리학(주자학)과 차이점
: 주자에게 있어서 性이란 개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자연적 속성의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원리(理)와 그에 대응하는 개체적 속성(性)이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 안에서 같은 체계로 맞물려 있다고 본다. 性은 내면에 선험적으로 갖춰진 절대적 본질이고, 도덕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서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性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理의 지위로 상정된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전우주적 절대적·보편적인 理가 내 마음속에 완전한 형태로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주자의 ‘性卽理‘의 개념 비판한다. 절대적·보편적 위치에 기대어 있는 도덕적 주체의 타율성을 비판하고, 도덕적 주체성이 理를 떠나 자율성을 가지고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산은 이에 性을 ‘욕구함’(欲), ‘즐김’(樂)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性은 절대불변의 원리가 아니라 한 개체가 가지는 지향성 즉 嗜好, 어떤 것을 선호하는 경향에 있다고 본다.
2. 성기호설에서의 性善
: 다산은 性은 善함을 주장하는 맹자의 性善說을 바탕으로 한다. 다산은 맹자가 ‘性善’을 논증하는 근거가 ‘성기호설’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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